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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by 꽃님 Jan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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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거실 뻐꾸기시계의 작은 바늘이 2시를 가리키고 큰 바늘은 5와 6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번 잠이 들면 아침이 될 때까지 자는데 저녁 반찬으로 엄마가 구운 고등어구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뜻하지 않게 새벽 기상을 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 이 시간까지 오빠가 자고 있을지, 공부하고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다. 오빠 방문을 살짝 빛만 겨우 새어 나올 정도로 조금 열고 한쪽 눈만 대고 들여다봤다. 창가 앞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오빠의 등이 보였다. 스탠드 조명만 오도카니 켜있고 적막만 흐르는 고요한 오빠 방에선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부드럽게 긁히는 소리만 감돌았다. 오빠가 공부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문을 닫으려는 찰나


"안 자고 뭐 해?"


하며 오빠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어, 어... 오빤?"


하고 되물었다.


"좋은 학교 가려면 열심히 해야지."


오빠는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곤 침대에 앉으라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침대를 탁탁 쳤다. 난 방 안으로 들어가 오빠가 탁탁 쳤던 자리에 앉았다. 오빠는 의자를 끌고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왜 일어났어? 화장실 가려고?"


오빠는 반달 같은 눈을 하곤 느끼하지만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가끔 이렇게 말할 때가 있는데 오빠가 장난기 발동할 때마다 나오는 말투다. 겉으론 으악! 징그러워! 우웩! 하지만 속으론 싫지 않고 오히려 정이 가서 좋았다.


"아니, 물 마시려고."


"물? 그래? 물은 마셨어요?"


또 장난치듯 말해서 이번엔 나도  맞장구쳤다.


"네에, 아주 시원하게 마셨어용."


"하하하, 내가  덕분에 웃는다."


별것도 아닌 말에 크게 웃을 일이 뭘까. 또 나를 놀리는구나 했다.


"그런데 오빤 왜 이렇게 열심히 해?"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그냥? 에이, 그게 뭐야?"


뭔가 거창한 대답이 나올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빠의 대답은 싱거웠다.


"그냥 하는 거야. 하던 거니까."


오빠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또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오빠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새롬아, 오빠 비밀 하나 알려줄까?"


라고 말했다.


"비밀? 어떤 건데?"


"이건 아무도 몰라. 엄마도 아빠도. 너하고 나만 아는 비밀이야."


"정말? 뭔데 뭔데? 빨리 알려줘."


"그전에 비밀을 꼭 지키겠다고 맹세해."


"맹세? 어떻게 하는 건데?"


"오른손을 들고 내가 하는 말 따라 하면 돼."


"응, 응. 알았어."


난 오빠가 시키는 대로 오른손을 들었다.


"나 박새롬은 박가람의 비밀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 박새롬은 박가람의 비밀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됐지?"


"응."


의자를 치운 오빠는 무릎을 꿇고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끌어냈다. 침대 넓이보다 조금 작은 거대한 레고 도시였다.

그 크기가  너무 넓어서 깜짝 놀랐다. 작고 귀여운 레고 조각들로 만들어진 건물들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걸리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빠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가득한 이 도시 중심에는 가운데 분수가 있는 넓은 광장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으로 카페와 상점이 늘어서 있다. 사람 모형들이 광장을 오가며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시의 동쪽에는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정교하게 조립된 빌딩들은 각기 다른 디자인과 색상을 가지고 있으며, 건물마다 실내조명까지 설치되어 밤에도 빛을 발한다. 건물 옥상에는 작은 정원과 헬기 착륙장이 있어 도시의 역동성을 더해준다.

서쪽에는 넓은 공원과 녹지가 펼쳐져 있다.  공원에는 호수와 다리가 있으며,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와 운동기구도 마련되어 있다.

남쪽에는 평화로운 주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색상의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각 집에는 정원이 딸려 있다. 주택가를 따라 작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북쪽 끝에는 항구가 있다. 항구에는 다양한 종류의 배와 크레인이 있고, 물이 표현된 파란색 레고 조각들이 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항구 주변에는 어시장과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어, 바다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 준다.

도시의 한 구석에는 작은 건물이 있다.


"와우! 오빠, 이거 다 오빠가 만든 거야?"


놀란 토끼눈을 하고 오빠와 레고도시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응. 아직 다 완성하지 못했어."


나는 도시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오빠 여긴 어디야? 왜 이 건물만 이렇게 작아?"


하고 물었다. 오빠는 한번 피식 웃더니


"내 작업실이야."


"작업실? 무슨 작업을 하는데?"


"레고 디자인."


"레고 디자인?"


"만약 내가 꿈이란 걸 갖게 된다면 레고 디자인을 하고 싶어."


"와, 진짜 멋있다."


"나도 꿈이란 걸 갖게 된다면 멋진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이 되고 싶어. 오빠, 여기  항구에 분홍색 배도 만들어줘. 깃발에는 새롬호라고 써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만들어 볼게."


"오빠, 진짜 멋지다. 이 레고 도시."


난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빠가 내 엄지를 손으로 꼭 감싸며 말했다.


"우리 새롬이 꿈도 꼭 이루어져라! 얍!"


오빠는 30분만 더 공부하고 잠든다고 했다. 어느새  잠이 몰려와 오빠 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온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오빠 방에 들어가 새벽에 보았던 레고 도시를 침대 밑에서 조심히 꺼냈다. 볼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조립했을까. 다시 봐도 정말 신기했다. 항구에 있는 배를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닻이 있는 배가 마음에 들어 침대 위에 놓고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엄마가 오빠 방문을 열었다. 방바닥 전체에 펼쳐져 있는 레고 도시를 보고 엄마는 입이 벌어졌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리고 이게 다 뭐야?"


침대 위에 있던 배를 얼른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엄마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레고도시에 다가왔다.


"오... 오빠가... 만든 거래."


난  비밀을 지키겠다고 오빠와 한 맹세를 깨트리고 말았다.


"오빠가 이걸 다 만들었다고?"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에 실망과 분노가 서서히 번져갔다. 엄마의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고, 얼굴에 경멸과 실망이 가득했다.

엄마는 손을 허리에 얹고, 레고 도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눈에는 실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엄마는 어딘가에서 상자를 가져오더니 오빠의 레고도시를 처참하게 부수며 조각들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오빠가 가장 아끼... 그러니까, 이건 오빠... 꿈이라고... 했는..."


엄마의  행동에 놀라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지만 당황한 난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엄마를 말리지도 못했다. 오빠의 꿈이 잔인하게 점점 파괴되고 있을 때  오빠가 들어왔다. 방문 앞에 선 오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가람아, 이게 뭐야? 너는 공부해야 할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엄마의 얼굴에는 실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엄마는 레고 도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오빠에게 강하게 질책했다.


 "이런 걸로는 아무런 미래도 없다는 걸 몰라? 너는 지금 중요한 시기에 이런 것에 빠져있으면 안 돼!"


"엄마... 그게..."


오빠는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오빠의 눈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했으며, 엄마의 부정적인 표정을 보자 오빠는 실망과 상처를 감추지 못했다. 오빠의 눈은 서글퍼지고, 어깨는 축 처졌다. 엄마는 떨리는 손으로 레고도시를 모두 부수어 상자에 모조리 쓸어 담았다. 오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차마 말리지 못하고, 눈물이 고였다.

엄마는 조각난 레고들을 상자에 담으며 차갑게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가람아. 현실을 직시해. 지금 중요한 건 네 미래야."


엄마는 상자를 들고 방을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공부에만 집중해. 더 이상 이런 일로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


엄마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오빠는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오빠를 보니 마음은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아파왔다. 오빠는 엄마의 말과 행동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오빠... 미... 미안해... 배만 살짝 보고 나가려고 한 건데..."


오빠는 내 말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오빠의 시선은 레고도시가 있었던 자리를 향해 멍하니 고정되어 있다.


"오빠... 미안해..."


"괜찮아... 생각 좀 정리하고 싶어. 그만 나가줄래?"


슬픔과 좌절이 섞인 오빠의 말을 듣고 나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조용히 오빠의 방을 나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모처럼 집안 청소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 청소를 하지 못해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이며 책, 쓰레기들을 치울 생각이다. 먼저 책상을 치우기로 했다. 책상에 쌓여있던 첨삭을 끝낸 학생들의 원고지를 완성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해서 각기 다른 상자에 담았다. 이것만 치웠는데도 책상은 말끔해졌다.  책꽂이  한쪽에 작고 귀여운 레고 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레고 배를 손에 들고 바라봤다. 오빠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레고 배를 오빠의 방에 갖다 놓기로 했다. 그날 오빠의 레고도시가 파괴되었던 날 가지고 나왔던 레고 배를 볼 때마다  오빠의 꿈을 뺏은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레고 배를 볼 때마다 그리움과 죄책감이 교차되어 때론 위로가 되었다가 고통이 되었다가 하며 날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오빠의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오빠 방에 들어왔다. 엄마가 오빠 방문을 열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방안의 모습이 날 숨 막히게 했었다. 그럴 때마다 숨이 안 쉬어져 밖으로 뛰쳐나가 바깥공기를 맡곤 했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몸에 와닿으면 바람이 내게  넌 살아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 숨이 터지고 곧 편안해졌다. 그렇게 외면했던 오빠 방을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방은 깔끔하고 단정했던 오빠 성격처럼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짐 없이 깔끔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방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하고 편안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파란 이불이 덮여 있는 침대, 5단 서랍장, 창가에 있는 책상, 그리고 침대 옆 벽면을 가득 채운 상장들. 오빠의 냄새도 그대로였다. 오빠의 책상 한쪽에 레고 배를 놓았다. 의자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무심코 침대 밑을 들여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오빠가 다시 만든 거대한 레고도시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손을 떨며 레고도시를 꺼내어 방 한가운데에 펼쳤다. 오빠가 남긴 레고도시는  오빠의 열정과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레고 도시를 바라보며, 오빠가 얼마나 이 일을 사랑했는지를 다시 한번 느꼈다.  눈은 점점 흐려졌고, 조용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빠의 손길이 닿은 레고 조각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오빠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항구에 있는 분홍색 배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배에 작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새롬호.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레고 도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외면했던 오빠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 차올랐고,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목 놓아 울었다.

오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며 오빠가 만든 조각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멈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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