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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웃는 아이 18화

그녀가 들어왔다

by 꽃님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휠체어를 밀며 주방 쪽으로 갔다. 휠체어에 앉은 자세로는 마음대로 해 먹고 싶은 요리를 할 수가 없어서 즉석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집 전자레인지는 하부장에 빌트인 되어 있어서 힘겹게 싱크대를 붙잡고 일어서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퇴근하는 길에 역주행으로 달려오는 차를 피하려다가 하천길로 뒤집히면서 내가 운전하던 차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왼쪽 다리뼈가 골절되어 수술을 받고 지금은 재활치료 중이다. 집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게 정말이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아래층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느 날 아래층 사람이 층간소음을 호소하기 위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내 모습을 보고 오히려 미안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카레를 데워서 먹을 거다. 아침에는 입맛이 없어서 죽을 대충 먹었다. 그래도 저녁만큼은 흰밥을 먹을 요량으로 카레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대충 한 끼를 해결할 참이다. 뜨겁게 데워진 카레를 꺼냈다. 카레향이 입 안에 침샘을 심하게 자극한다. 얼른 밥통에서 흰밥을 푸고 카레를 식탁 위로 옮겨서 김치와 함께 조촐한 한 상을 차려 놓았다. 허기가 몰려와 밥 위에 카레를 뿌리고 슥슥 비벼서 숟가락으로 퍼서 노란 밥 위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 입 안으로 넣으려던 찰나


딩동,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인터폰 화면에 30대가량 돼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드디어 내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나 보다고 생각하며 식탁 옆에 세워둔 커튼봉을 들고 인터폰 쪽으로 가서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긴 생머리, 오뚝한 코, 커다란 눈, 세련되게 생긴 얼굴... 그녀 뒤로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의 예쁜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다. 층간소음을 따지러 온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작은 방 쪽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지? 나는 순간 당황해서 얼음이 되었다. 겉모습은 예의 바른 모습이지만 실상은 무례한 사람으로 층간소음의 근원지를 찾아다니는 걸까? 갑자기 들어와서 난데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간 이유가 뭘까? 낯선 여인이 내 집으로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내 방으로 들어간 일은 흔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층간소음 때문이 아니라면 그녀가 방 안에서 무얼 하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혹시 내가 알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자기 집으로 착각한 걸까. 술을 마셨다고 보기엔 너무도 멀쩡해 보여서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그녀는 왜 저 방에 들어간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살짝 아주 조금만 열어보았다.

그녀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 놓여있는 손소독제를 두세 번 눌러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교재 같기도 하고 책 같은 것을 꺼내더니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가량 내 방에 머물던 그녀가 나오더니 내 쪽을 향해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이 황당한 상황에 어떠한 대처를 했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쑤욱 들어오더니 다시 쑤욱 나가면서 내 정신도 함께 나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또 그녀가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야 하나 그냥 있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호기심이 발동해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와 그때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내 책상 앞에 앉은 다음 습관처럼 손소독제를 묻혀 꼼꼼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은 후 교재와 책을 꺼내 놓고 혼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 용기를 내어 방문을 조금 더 열었다.


"지우가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면 잘하는 것도 생길 거고 잘하게 되는 걸 시험해보고 싶기도 할 거야. 하나하나씩 도전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지우가 간절히 바라는 꿈을 이루게 될 거야."


그녀는 지우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귀신이라도 보는 건지 혼자서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라 경찰이라도 불러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난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꼭, 꿈을 이뤄서 지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으면 좋겠어."


함박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는 그녀가 나오려고 해서 다급하게 휠체어를 움직여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또다시 내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나를 지우라는 사람의 어머니로 보는 듯했다.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고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일주일이 또 지났다. 이제 나는 그녀가 기다려진다. 매주 같은 시간에 벨을 누르고 들어오는 그녀가 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호박을 썰다가 실수로 엄지 손가락을 베었다. 다행스럽게도 심하게 베이진 않았다. 반창고를 대충 붙이고 다시 찌개를 끓이려고 하는데 그녀가 벨을 눌렀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늘 하던 대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 시간가량 지나 나오더니 갑자기 내 앞으로 와서는


"지우야, 엄지손가락은 어쩌다 다친 거야?"


하더니 내 엄지손가락을 잡으며


"잠깐 봐도 될까? 보여줄 수 있어?"


하는 거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그 안에 있는 네임펜으로 내 엄지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반창고에다 해바라기를 그렸다.


"다음엔 이것보다 더 예쁘게 그려줄 게. 그러니까 손톱 꼭 예쁘게 길러야 돼. 알았지? 약속!"


이라고 말하고는 나를 쳐다보며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마치 천사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아기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날 이후 그녀가 누구와 대화를 하는 건지 그녀의 세상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녀는 왜 하필 나였을까. 그녀가 다른 집으로 갔다면 경찰에 신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났다면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우리 집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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