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같은 시간 다른 모습으로 그녀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은 내가 지우가 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지우 어머니가 되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 그녀에 관한 일을 기록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손소독제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녀가 오면 이 책상에 앉아서 작은 손으로 손소독제를 뽁뽁 눌러 정성스럽게 손을 닦았더랬다. 조용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최근에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까지 세세하게 적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도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상황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서 놀라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녀 자체가 좋았다. 일부러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연극배우가 혼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사였을까. 그녀는.
세탁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쓰레기가 쌓여서 산을 이루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 조금은 게을러도 좋다고 애써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정갈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던 과거의 자아가 튀어나왔다.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봉지를 하나씩 꺼내어 현관문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두 다리 대신 두 바퀴 덕분에 모든 쓰레기를 현관문 앞에 놓을 수 있었다. 쓰레기 봉지 2개를 무릎 위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양손은 바퀴를 구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노부인 한 분이 걸어오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안녕하세요. 옆집에 사시죠?"
마르고 힘이 없어 보이는 노부인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주름진 얼굴 너머에 보름달처럼 온화한 여인이 보였다.
"아... 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계속된 인연을 만드는가 보다.
"저도 옆집에 살아요."
그녀의 어머니다.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눈빛이 많이 닮아 있었다. 주름 속에 숨은 구슬 같은 눈동자는 호수보다 깊고 수정보다 맑았다. 어머니의 눈 속에 그녀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몸도 불편할 텐데 쓰레기를 어떻게 버리려고. 이리 줘요. 내가 버려 줄게요."
"아,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내 무릎 위에 있는 쓰레기봉투를 양손으로 잡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뒤를 따랐지만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며 결국 쓰레기를 버려주셨다.
"또 있죠? 이참에 다 내다 버리세요. 앞서요. 얼른!"
그녀의 어머니가 휠체어를 살짝 밀며 걸었다. 얼떨결에 집 앞까지 오게 되었고 현관문을 열자 조심스럽게 먼저 들어가 현관문 앞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를 보시더니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도와줄 사람도 없어요? 몸도 성치 않은 것 같은데..."
하며 쓰레기를 밖으로 옮겼다. 그녀의 어머니가 혼자서 현관문 안과 밖을 오가며 바쁘게 쓰레기를 옮기는 동안 난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해 그녀의 어머니를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다. 혼자서 그녀의 어머니는 그 많은 쓰레기를 기어이 다 날랐다. 죄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잔 줄래요?"
하시는 거다. 나는 얼른 그러겠다고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으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그녀의 어머니는 거실을 한번 휙 눈으로 둘러보고는 작고 초라한 식탁으로 와 의자를 꺼내 앉았다. 커피를 타서 식탁 위에 놓았다. 미소를 한번 지으시더니
"우리 애가 갑자기 들어와서 많이 놀라셨죠?"
라고 말했다.
"아니오. 놀라진 않았어요."
"착한 분이네요."
그녀의 어머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우리 애는 착한 애예요.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다.
"저... 어머니... 혹시 따님 이름이 뭐예요? 아... 아니..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시고요. 다음에 또 저희 집에 오면 이름이라도 불러 드리려..."
"지우에요. 박지우."
"네? 지, 지우라고요?"
"네. 저희 애가 지우를 가르치고 있죠?"
"아, 그게... 저기 작은 방에서 지우라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 같더라고요. 언제는 저한테 지우 어머니라고도 했고요."
"네. 지우가 지우를 가르치고 있어요. 지우는 자신을 새롬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새롬이요?"
"네. 지우라고 부르면 대답 안 할 거예요. 새롬이라고 불러야 할 거예요. 사실 지우가 어렸을 때 큰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요? 어떤 사고요?"
"지우가 5학년 때 지우 오빠가 죽었어요. 그때 충격이 컸었나 봐요.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애를 잘 돌보지 못했어요. 지우 오빠가 죽고 나서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전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지우도 많이 아팠던 걸 우린 몰랐어요. 티를 내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몰랐던 걸 수도 있어요. 세월이 흐르고 우린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지우에게도 관심을 주기 시작했어요. 저는 지우가 공부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지우 오빠가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쳤거든요. 하나뿐인 자식을 또 잃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지우는 공부밖에 하지 않았어요. 집착을 넘어 강박이 될 정도로 공부만 했어요. 저는 그런 지우가 정말 무서웠어요. 말리려고 해도 소용없었어요. 수능 만점을 맞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1년도 안 돼서 휴학을 했어요."
"휴학을 한 이유가..."
"강의 시간에 혼잣말을 해서요. 가끔 혼자서 말하고 대답하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지우를 이상하게 봤어요. 학교에서는 지우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요."
"아... 네..."
"정말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우리 애 때문에 피해를 보고 계셔서. 제가 어떻게든 우리 애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어머니. 새롬 씨, 아... 니... 지우 씨 저희 집에 와도 괜찮습니다. 와도 작은 방에서 잠깐 머물다가 가서 그다지 제게 뭐.. 피해를 주진 않아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유, 안 되죠. 그러면... 그러면, 안 되죠. 정말 그건... 정말이지, 너무 폐를 끼치는 거라."
지우 씨 어머니는 내게 계속 미안하단 말만 되풀이했다. 문을 열고 나갈 때도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를 위해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이사를 온 건지도 모른다. 그 어떤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앞으로 벌어질 일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일 거라는 아주 기묘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과거의 자신을 가르치는 여인을 마음에 담는 아주 기묘한 일이 내게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