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가람이 오빠, 맞아?"
그녀가 나를 보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힘을 내어 오빠라고 불렀다.
"괜찮으세요? 전 가람이 아니고 홍준호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내 이름을 말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지우나 지우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항상 지우이거나 지우 어머니라고 하며 나를 불렀는데 오늘은 온전한 나로 보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내 이름 석자를 꼭 알려주고 싶었다.
"어른이 왜 어린아이를 자꾸 만나는 건가요? 경찰관이 다시는 아이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데요. 이게 무슨 짓이죠?"
"그게... 뭔가 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오해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녀와의 대화가 사라지기 전에 아니 그녀가 다시 날 지우나 지우 어머니로 보기 전에 그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싶어 태연하게 음식을 권했다.
"네. 지금은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고. 일단 식사를 하지 않으셨으면 식사부터 좀 하시죠."
"도대체 아픈 아이를 자꾸만 만나려는 저의가 뭔가요?"
"저의요? 그런 거 없어요. 아픈 아이요? 누가요? 지우요?"
"네. 왜 자꾸 지우를."
나는 그녀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러면 그녀가 조금 놀랄 거고 아주 잠깐이라도 현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우요? 아프다고요? 어쩌면 선생님이야말로 아픈 건지도 모르겠군요!."
조금씩 현실로 그녀를 데려오고 싶었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다 보면 서서히 서서히 현실을 보여주다 보면 그녀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희미한 불빛처럼 솟아났다.
"뭐, 뭐라고요?"
놀란 토끼눈을 한 그녀가 한참을 노려보다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가버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희망을 보았다. 그녀가 나를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는 신념 같은 것이 생겼다. 우연히 그녀의 세상을 들여다보게 되었지만 슬픔과 연민, 후회로 가득한 안타까운 그녀의 세상이 가엾고 안쓰러워 도저히 그곳에 그녀를 홀로 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내가 사는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고통과 아픔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내가 그녀를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온다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다
여느 때처럼 한가롭게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집안에서 더 이상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이제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휠체어를 구르며 집 안을 다닐 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제 조금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게 되었다. 조금은 자유로워진 몸을 소파에 편안히 누이고 평소 즐겨보던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그저 웃음만 피식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끙끙거리며 몸을 움직여 겨우겨우 생활을 했었는데 쓰레기조차도 속 시원하게 버리지 못했을 때를 생각하면 훨훨 날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늘따라 예능프로그램 속 출연자들의 입담이 참 재밌기도 하다. 키득키득 웃으며 한참 tv를 보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들여다보니 그녀였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었다. 갑자기 그녀가 뛰어 들어오더니 내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거실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도 바로 거실 베란다로 그녀를 따라 나갔다. 거실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없었다. 그녀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야, 안 돼! 꼭 잡아! 절대로 널 놓지 않을 거야!"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쳐다보며 지우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난간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한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대고 힘겹게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을 뻗어 아래로 쳐져있는 그녀의 다른 손을 달라고 소리쳤다.
"지우 씨! 내 손 잡아요! 제발요!"
"안 돼요. 그러면 지우가 떨어져요. 제발 지우를 구해주세요!"
"지우 씨, 내 손 잡아줘요. 제발요. 그래야 지우 씨가 살아요!"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한쪽 발로 버티며 그녀를 잡아끌고 있었다. 제발 그녀가 다른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거듭 부탁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더는 그녀를 붙잡고 있지 못할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새롬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지우 손 놓으세요. 그래야, 지우도 살고 새롬 씨도 살아요!"
"싫어요! 우리 지우... 구해줘요! 제발요! 부탁할게요."
"새롬아! 새롬아! 제발! 지우 없어! 지우 없다고! 아래를 봐! 보라고! 똑바로 보라고! 지우 없어!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내 손 잡아줘..."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아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품에 그녀가 안긴 채 서럽게 울고 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나를 보게 했다.
"괜찮아요? 지우 씨?"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떠 내 얼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가녀린 그녀가 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지우가... 사.. 라... 졌... 어... 요..."
"도대체 지우는 어디로 간 거죠? 방금 제가 지우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지우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 여기 제 앞에 이렇게 있는 걸요."
"뭐라고요?"
"지우는 당신 곁에 있어요. 당신 속에 지우가 있어요. 당신은 곧 지우를 만나게 될 거예요."
"지우가 제 안에... 있다고요?"
"네. 당신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요."
그녀의 얼굴에서 환하게 웃는 지우의 얼굴이 잠시 드리우다 사라졌다.
저녁노을이 바다 위로 부드럽게 퍼졌다. 분홍빛이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며 반짝이고, 나는 깊은숨을 들이키며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우리 두 사람의 하루의 끝자락을 더욱 감미롭게 만들고 있다. 잔잔한 엔진소리와 듬직하게 요트를 조종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끝없는 수평선 너머 일렁이는 파도를 품은 바다를 조종하는 듯하다.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노을빛이 그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곧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확실하지 않지만 나와 함께인 그는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바다를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행복을 노래하는 바람과 미래를 속삭이는 파도가 우리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