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남편 점심 도시락을 싼다. 최근 남편 회사가 오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자율적으로 점심밥을 사 먹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팀원들과 도시락을 단체로 구입해서 먹을지 아니면 각자 도시락을 싸올지 고민하는 와중에 남편은 도시락을 싸가는 걸로 정했다.
남편은 밑반찬을 해놓으면 아침에 직접 싸가겠다고 했지만 내 성격상 그걸 가만히 보기가 어렵다. (이미 열심히 만든 내 작품(요리)을 막무가내로 도시락통에 넣어가는 걸 내 마음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저번 주 이틀 동안 도시락을 싸 보고 느낀 좋은 점은 밑반찬을 만들어놓으니 그날 저녁에 힘들게 요리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도시락에 넣었던 밑반찬을 재탕으로 저녁을 먹는다.
남편과 친한 동료는 아직 부인이랑 도시락에 대한 얘기를 끝내지 못했다고 이번 주 월요일은 라면 사 먹자고 카톡이 왔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웨이 내 남편은 나는 도시락 싸간다 카톡을 틱! 하고 보내버린다. 그 모습을 보면 남편이 참 독특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쨌든 회사에서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은 우리 남편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도시락 싸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나는 흔쾌히 싸주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도시락 경력직이었다.
내가 도시락 경험이 꽤 되는 사람이란 걸 까먹고 있었다. 고3 미술학원 입시특강 시절엔 점심은 도시락을 먹었다. 여럿이 모여서 도시락을 함께 까먹었는데 그때 느낀 건 같은 반찬인데도 향이 제 각각이고 맛이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반찬 종류가 달라도 같은 사람이 만든 건 음식에 향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거다. 음식에 특유의 군내가 나는 집도 있었는데 젓갈을 쓰지 않는 반찬인데도 그 집 반찬에서는 그 똑같은 군내가 동일하게 났다.
요리 경력이 많은 엄마들의 도시락 사이에서 내가 싸간 도시락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은 개의치 않고 내가 만든 반찬이 맛있다며 함께 반찬을 먹어주기도 했다. 참 고마웠다.
여러 가정의 음식을 먹어보며 내 입에 맛있는 반찬은 머릿속으로 기억을 해두고 직접 집에서 만들어봤다.
소금 설탕 간장 마늘 된장 고추장 기본양념을 섞어가며 만들다 보면 비슷한 맛이 되는데 한번 만들어 본 음식은 그다음부터 레시피를 굳이 보지 않아도 입맛으로 기억해서 만들 수 있었다.
재수 시절 수시로 대학교에 합격하고 평촌 롯데백화점 매대에서 판매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10시 50분쯤 출근해서 저녁 8시쯤 퇴근을 했고 점심은 사내식당에서 식권을 구매해서 먹어야 했다.
근데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고 점심을 쫄쫄 굶을 수도 없으니 도시락을 싸가기로 결정했다. 메뉴는 선택사항이 없이 김치볶음밥으로 정해졌다. 쌀과 김치는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보내주셔서 그 두 가지는 집에 있는 유일한 재료였다.
첫 아르바이트 월급이 나오기까지 김치볶음밥을 물릴 정도로 먹었다. 도시락 싸가는 것도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사내 식당에서 남들이 쳐다볼까 봐 구석으로 들어가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찌질함의 바이브 아닌가 싶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뭘 먹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그 한 달 동안 김치볶음밥을 마스터했다. 어느 날은 김치 국물 양을 많이 넣어서 국물 진한 맛의 김치볶음밥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간장을 넣어서 삼삼하게 만든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근데 이렇게 저렇게 먹어도 맛있지가 않았다. 그저 짠 내 나는 김치볶음밥으로 느껴져서 서글프기만 했다.
도시락 경력직은 만들어놓은 밑반찬을 도시락 통에 착착 이쁘게 담아낸다. 밥은 자기 전 미리 해둔다. 미니 돈가스나 찌개는 도시락을 싸기 전 끓여내거나 튀겨서 담아내면 된다. 내가 먹으려고 싸던 도시락보다 누군가를 먹이려고 싸는 도시락이 더 즐겁다.
이젠 짠 내 나던 도시락이 아니라 달달한 도시락으로 변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