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사람이 있다.

버팀목이 되는 뜻밖의 만남,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만남.

똑똑!


모두가 퇴근하고 난 금요일 저녁에 노크를 하고 다른 부서의 부장님 한 분이 들어오신다.

“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막 퇴근하려고 주섬 주섬 짐을 챙기던 나는 부장님을 반기면서 묻는다.


부장님이 나직하게 말씀하신다.

“아 상무님, 그게 홍 부장님이 다음 달까지 근무하고 퇴사하기로 결정하셨대요. 저희가 롤링페이퍼를 만들어서 액자에 담아 드리려고 해요. 상무님도 참여하시고 싶으실 것 같아서 알려드리려고요.”


“안 그래도 저도 소식 들었어요. 당연하죠. 저도 홍 부장님 송별하는데 같이 참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메시지 적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홍 부장님은 광주에 계신데 이 쪽에(본사)에도 올라오실 기회가 있을까요? ” 내가 물었다.


“홍 부장님이 전국에 인사 다니실 예정인데 시도는 해 보겠지만 바쁘실 것 같아서 본사에는 못 오실 수도 있대요. 그래서 저희 팀이 외근 가는 김에 다녀오려고요.”


“아 그렇군요. 저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가방을 내려놓았다.


책상에 잠시 앉아 몇 자 적으려고 하니 홍 부장님과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 허락된 작은 지면이 부장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기에 부족해서 혼자 노트북에 몇 자 썼다 지웠다 하며 불필요한 단어를 줄이고 최대한 나의 진심을 함축한 문장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 홍 부장님은 우리에게, 내게, 사람들에게, 금요일 저녁에 부장님과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서 소박한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하고 퇴근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런 분이다.



나는 2021년 가을에 홍 부장님의 상사로 부장님을 처음 만났다.


이제 좀 더 과거로 돌아가 다른 이야기를 보태야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뚜렷한 목표와 계획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았다. 대학은 부모님의 기대와 나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채우는 소위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썩 원하는 전공도 아니었고, 4년을 마치고는 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막막했다. 대학을 졸업 후 비영리 기관에서 일을 하고 스물여덟이 되어 취직을 할까 수학 보습 학원을 할까 고민하였고 이력서에 번호를 매겨가며 구직을 하다가 다이어리에 이력서 번호가 100번을 넘어갔다. 어떤 회사는 졸업한 지 오래된 여자여서 어정쩡해서 연이 닿지 않았고, 또 어떤 회사는 오버스펙이라 연이 닿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니까 그저 나의 쓰임새 있을 것 같은 회사란 회사는 다 지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인연이 닿는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 안 되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동네 작은 학원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는 즈음에 전공 무관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자동차회사 해외영업부서에 합격이 되어 계획에 없던 자동차 산업에 입문을 하였다.


운 좋게 입사한 회사는 이름을 대면 모두 하는 회사이므로 여전히 부모님과 나의 자존심을 지켰지만 매일 나의 삶의 의미를 물어야 했고, 이 일은 내가 계속할 만한 그런 가치 있는 일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었는데 나는 변화를 잘 수용했다. 내 현재의 직무를 너무나 사랑하거나 그 일만이 내게 유일한 의미가 아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원하는 새로운 일과 다른 부서로의 전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첫째 아이를 낳기 위해서 출산 휴가를 갈 때 그 부서로 돌아갈 줄 알고 내 일을 나눠 맡은 동료들에게 밥을 사며 미안해했지만 나는 그 부서로 돌아가지 않았다. 육아 휴직을 마칠 즈음에 다른 부서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온 부장님께 쿨하게 …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하고 새로운 부서로 출근했다.


둘째 아이 가졌을 때는 어느 회의에서 발표하는 나를 눈여겨보신 한 전무님의 제안으로 다시 한번 둘째 아이 낳고 돌아와 새로운 부서에 출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는 것이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곳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한 팀이 되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지 생존을 위해 터득한 노하우는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어릴 적에 건설회사를 다니신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많이 다녔더랬다.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가면 그곳의 터줏대감들이 나의 외모, 옷차림, 말투와 성격 모든 것을 스캔하며 (어린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의 호기심 어린 행동과 눈빛이 그런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함께 어울려 놀만한 아이인지, 아니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지, 공부를 썩 잘해서 본인들의 위로 올 것인지, 아니면 저 아래 바닥을 깔아줄지 그런 수많은 관찰과 해석과 넘겨짚음이 먼저 있다. 그런 과정이 지나가고 나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나의 친구가 될 만한, 그리고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아이들이 하나 둘 서서히 빛을 바라며 나에게 다가오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반에는 나의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교과 진도가 달라서 처음에 본 시험에서는 점수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 저 아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고 안심하는 사이에 나는 부지런히 학교 분위기도 익히고 교과 내용에 익숙해지면서 시간을 보내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공부도 따라잡고 그 반에 속한, 그 반에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어 있더라.


다시 돌아가서 회사에서 회사가 원하는 여러 부서에서 일할 기회를 얻으면서 어느새 팀장이 되었고 팀장으로 일을 몇 해 하다 보니 이번에는 한번 더 경험해 보지 못한 부서에서 일을 해 보지 않겠는지 다시 한번 제의를 받았다. 이번에는 여러 팀을 이끄는 담당 임원의 자리였는데 약속이 된 것은 아니라 그 자리에 지원해서 면접을 볼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지원을 했다. 나도 열심히 준비를 하였고 한 시간가량 국어와 영어를 넘나들며 세 명의 본부장들의 다양한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면 평소 이 부서의 일을 옆에서 협력하면서 봤을 때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도 될지 물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파워포인트 자료로 그 부서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제시하였다. 나는 진땀이 났지만 면접관들은 뜻밖의 프레젠테이션이 신선한 듯 미소를 보였다.


얼마 후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런 속내도 모르고 사람들은 왜 우리 부서에 저 여자가 임원으로 오는지 의아해했고 또는 낙하산으로 온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이곳이 내 여덟 번째 보직이었다.


두 번째 부서, 세 번째 부서….. 일곱 번째 부서가 그러했듯 여덟 번째 부서에서의 첫 날도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업무 소개로 일정들이 빼곡히 채워져 빠르게 지나갔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나서 삼삼오오 차를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아 고요히 보냈던 30여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내가 부서 이동을 하고 새 일을 할 때마다 적응하고 애를 쓰는 과정을 늘 지켜봤던 남편이 오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어때 할 만해?”

“응. 좀 막막해. 이 부서는 전의 부서와 또 분위기가 다르네. 하루가 길게 느껴져. “

”아 그래? 걱정하지 마.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

남편의 짧은 격려가 이토록 힘이 되는지…

그래 나는 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나는 여기서 또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것임을 안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인생을, 직장생활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길을 따라 걸을 때 새로운 방의 문이 보이면 두렵지만 다시 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는데 그 새로운 방에는 언제나 계획하지 않은 삶에 뜻밖의 선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중한 만남과 그 만남으로 알게 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이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빨리 끝내고 싶은 만남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의 하루와 순간이 고통스러울 때 그 분노와 성남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하고 집으로 들고 돌아와 아무 이유 없이 아이들에게 화를 내었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엄마가 오늘 회사에서 뭐가 잘 안 풀렸나 보다 이렇게 헤아리며 눈치를 보곤 했다.


그러나 그 와는 비교가 안 되는 깊은 만남이 있었다. 함께 일하는 시간은 많지 않아도 일을 통해 동료가 된 후에 외근을 다닐 때, 밥을 먹을 때, 운전을 하며 이동할 때 김 차장, 이대리, 차부장님 이런 ‘직함’을 떼고 진정성 있는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더라는 말이다. 그때 그런 귀한 시간이 오는 것을 알아채고 절대 놓치지 말고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하다 보면 서로를 알아가고 신뢰가 쌓여가는 것 같다. 그런 후에 함께 일할 때 우리는 팀워크, 동료애로 연결되고 사업이 어려워 터널 같은 시간을 함께 통과할 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는 것 같다. 함께 성장하는 이런 만남을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이 인생과 직장생활에서 맞닥뜨릴 때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진하게 느끼곤 한다.


이제 곧 작별해야 하는 홍 부장님은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은 신 것 같다. 나는 그의 예상을 깨고 나타난 열 살 아래 상사, 그것도 그 분야의 일을 잘 모르는 여자 상사였다. 홍 부장님은 그 부서에서 30년 동안 일을 하며 필드를 누비신 베테랑이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뭐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고 잘못된 만남이겠지. 얼마나 불편하고 못마땅하셨을까? 나는 그때 홍 부장님과 다른 부장님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 겸손과 경청을 일 순위로 두고 부장님들을 마주해야 했다.


조직에서 임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실무자나 전문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 조직에서는 그렇다. 오히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이 각자의 악기가 최고의 선율을 만들되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곡으로 무대에 오르고 박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휘자는 아마도 그 연주곡의 작곡가의 의도와 곡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어디에 강약을 둘 지 어느 곳은 힘을 빼고 어느 곳에서 클라이맥스를 만들지 리드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각 악기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각자 악기의 소리를 듣고 그에 맞는 코칭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연주자는 같은 사람인데 지휘자가 다를 때 다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운동도 그렇고 팀웤을 요구하는 일은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때로는 회사나 조직에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부서의 일을 제일 잘 아는 사람으로 임원을 발탁할 때도 있지만 그 부서에 모자란 어떤 것을 불어넣기 위해서, 즉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부서의 리더를 들일 때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그 부서의 일은 몰랐지만 그 부서가 더 나은 조직으로, 더 나은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서는, 다양성과 포용성, 유연성의 문화가 필요했기에 그들이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 상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지금까지도 감사한 것은 그들의 성숙함이다. 홍 부장님을 비롯해 다른 부장님들이 나와 첫 업무 미팅을 할 때에 우리는 서로 간에 서먹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이내 부장님들은 나를 가이드하여 그들의 삶의 현장(필드)으로 들어가 그들의 경험과 지식과 연륜을 배우도록 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우리 조직이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짚어야 하는 질문들을 함으로써 조직이 오래도록 하던 일의 방식과 생각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분들은 그러한 방향성이 직원들의 저항을 불러일을 킬 때 다시 한번 현장에서 소통해 주시고 직원들을 동기부여해 주셨다.


나는 홍 부장님과 함께 외근을 많이 다녔다. 대구, 광주, 부산, 대전 등 아래 지역의 많은 대리점들을 함께 방문하여 사업장마다 처한 어려움을 경청하여 문제 해결의 과정을 겪어 나가는 비즈니스의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사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지금은 오십 대 중반이신 부장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 대학생이 된 자녀들을 키웠던 이야기, 건강의 어려움이 있어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게 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의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다시 새로운 부서로 이동한 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드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우리가 직장의 모든 관계는 그저 그렇다. 지겹다. 정치다. 경쟁이다. 이렇게 선을 긋고 편견과 고집으로 마음을 닫고 매일 여덟 시간, 매주 사십 시간, 한 달, 일 년 이렇게 계속 보내고 있다면 완전한 착각이고 실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저 이제 퇴사할래요. “ 하며 회의실에서 엉엉 울 때 크리넥스를 가져다주시면서 “최팀장, 부장 달고 나가.. 좀 더 견뎌보자. 이 회사에서 얻어갈 것은 얻고 나가야지.” 하면서 다독여줬던 이 부장님


모두 퇴근한 후에 야근을 할 때 억울하고 고되어 잔뜩 화가 나 있는 나를 보고 퇴근하던 발길을 돌려 뜨끈한 도가니탕을 사주셨던 김상무 님


지금은 퇴직하셨지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카톡을 보내면 저 멀리 미국 애리조나에서도 조언을 해 주시는 미국인 부사장님


내 인생에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마흔여덟의 나는 아마 서른여덟에 직장생활을 진작 그만두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은 여전히 녹록지가 않다. 어떤 날은 고독하고, 어떤 날은 야속하다. 어떤 날은 꽤나 만족스러운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사이에 있는 뜻밖의 소중한 만남은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주고 또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다른 누군가를 돕고 싶게 만든다.


직장은 삶이고 직장에는 사람이 있다. 그 믿음과 확신을 놓지 않는다면 나는 매일 성실히 출근할 용기, 길고 지루해 보이는 이 여정을 지속할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홍 부장님을 만나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눠야겠다. 그리고 이후에는 사회에서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고 직함을 뗀 인생 선후배의 우정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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