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리 Jun 17. 2018

먹고사니즘과 첫번역니즘 사이

한 문장, 한 문장 빼먹지 말고 옮겨야 책 한 권

외서 계약 과정은 대부분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떤 책은 계약 의사를 밝히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기도 하고 어떤 책은 계약하겠다고 답을 보내도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끌기도 한다. <미란다처럼>의 경우에는 판권을 문의하고 계약이 완벽하게 체결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계약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자 에이전시에서 출판사 소개서를 요청해왔다. 그러면 그렇지. 출간한 책이 하나도 없는 초짜 출판사에 뭘 믿고 선뜻 계약을 해주겠어? 사실 이 책 하나 만들려고 등록한 출판사였지만 그렇게 보낼 순 없으니 상상력을 동원해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성들을 위한 에세이를 낼 계획이고 앞으로 이런 책들을 출간할 거야. '서울 책 여행' '스물일곱 소녀의 생존 가이드' '책의 탄생(이건 무려 그래픽노블)' '덴마크 행복 한 스푼(계약도 안 한 원서)' 그리고 왜 <미란다처럼>을 원하냐는 질문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의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대체불가능한 책이라고 적었다. 마케팅 계획에는 큰 출판사에서는 하도 책을 많이 내서 집중하기 힘든데, 나에게는 이 책이 처음이자 (한동안...) 유일한 책이기에 집중해서 책을 소개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적었다. (오오, 이건 지금 봐도 잘했어!) 


포부(뻥 50%)가 가득한 2013년에 보냈던 출판사 소개서


이렇게 보내고 약 한 달 후에 에이전시에서 계약을 진행하자며 계약 조건을 보내왔다. 선인세는 2000$, 18개월 내에 번역서를 출간해야 하며 계약 기간은 5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작가나 화제작이 아닌 책에 붙는 평균적인 조건인 듯했다. 아주 핫(!)한 타이틀에는 경쟁이 붙고 출판사끼리 선인세를 올리면서 입찰을 하기도 한다. 당시 환율로 환산해 240만원 정도를 입금하고 에이전시 수수료 33만원까지 입금하고 나니 도톰한 영문 계약서가 도착했다. 다행히 에이전시에서 중요한 사항을 한글로 요약해 보내주기 때문에 이 내용을 중점적으로 확인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계약을 완료한 후 도착한 원서


계약이 완료되자 작업용 원서 3부가 택배로 도착했다. 드디어 번역을 시작할 순간이 왔다. 처음에는 의욕에 가득 차서 엑셀에 번역 스케쥴을 세웠다. 하루에 요 정도씩 하면 3개월 후에는 번역 완료다!!!! 



물론, 당연히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장의 수입이 없기 때문에 외주 편집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번역 스케쥴이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이러다가 이도저도 못 하고 외주 편집일만 하다가 돈 벌기 위해 다른 일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게다가 조금 번역해놓고 보니 '이걸 누가 재밌다고 해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첫 장을 겨우 번역하고 베타 테스터 1호에게 보여줬더니 돌아오는 말. 


"이건 너무 진지한 네 말투야. 미란다에 빙의를 하란 말이야! 더 재밌게! 더 익살스럽게 !" 


네가 해봐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피드백 받을 곳이 많지 않았기에 성질을 죽이고 다시 번역한 원고를 들여다 보았다. 음- 너무 차분해. 내 말투가 너무 드러난 번역 원고는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먹고사니즘과 첫번역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며 시간은 계속 흘렀다. 자신감 곡선이 바닥을 향해 한없이 내리 꽂히던 어느 날 밤, 나는 잠자리를 뒤척이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 출판은 나 혼자 만족하자고 벌이는 자위 행위가 아닐까? 없는 살림에 너무나 사치스러운 돈지랄이 아닐까? 번역을 해도 다시 다듬고 편집하고 디자인까지 해야 하는데... 유통하려면 서점들과 계약도 해야 하고, 매달 물류 창고 보관 비용도 들 테고... 까마득하다... 무슨 번역을 이따구로 했냐고 비웃음 당하진 않을까? 차라리 번역 판권을 다른 출판사에 팔까?'


너무 뒷일까지 더해 걱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리고 일기장을 꺼냈다. 너무 먼 미래의 고민을 하나, 하나씩 지우고 노트의 빈 공간에 이렇게 적었다. 



그래,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는 거야. 최선을 다해서 쓰레기 같은 결과가 나오면 내가 그 정도라는 거고. 그걸 알아보고 싶어서 시작한 거잖아? 일단은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그거 하나만 보고 가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트콤 <미란다>를 다시 틀었다. 며칠 동안 반복해서 보면서 말투와 뉘앙스를 익혔다. 딱딱했던 번역문도 고치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주인공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시트콤 캐릭터의 연장 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시트콤 속 미란다 캐릭터의 말투를 그대로 살려야 했다.  


‘나는 미란다다...'
‘나는 미란다다...'
‘나는 미란다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첫 문장.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반가워요. 제가 쓴 책을 선보이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네요. 자, 이제 세 번째 문장까지 왔으니 편하게 앉으세요. 아니면 눕든가요. 해변에 자리를 깔든지 침대에 파묻히든지 하세요. 베개로 요새를 만들어 놓았다고요? 짝짝짝! 참 잘했어요! 눈치 따윈 던져 버리고 서점 바닥에 누워 짧은 휴식을 취하는 분도 있다고요? (흠, 실제로 이런 분이 있다면… 실례지만, 좀 이상한 분 같군요.)”


번역을 하다가 알 수 없는 내용이 나오거나 잘 모르는 영국 문화가 나올 때는 번역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망망대해 같은 인터넷에서 영어의 압박을 느끼며 검색을 하고 유투브와 위키피디아를 헤매다 보면 하루가 꼴딱 샜다. 그래도 다른 책과 달리 '덕후가 만든 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배경에 대한 주석도 넣고 미란다의 필모그래피나 다양한 뒷이야기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기존의 책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조금 어설픈 티가 나더라도 색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미란다 덕후를 위한 공감의 체크 박스와 컬러링 페이지


맨 뒤에 실린 미란다의 필모그래피
뒷날개에 실린 미란다에 대한 TMI(Too Much Information)


원서로 323페이지였던 책을 번역서로 만드니 328페이지가 되었다. 대체 언제 다 하나 싶었던 번역도 끝이 있었다. 번역한 원고를 출력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는데, 참 새로웠다. 


이게 내가 번역한 거라고? 진짜 내가 책 한 권을 번역한 게 맞나? 


아직까지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서 읽어볼 때마다 내가 한 권의 책을 통째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이전 02화 난생처음 영국 사람과 메일을 주고받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