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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n 10. 2018

난생처음 영국 사람과
메일을 주고받다

"그쪽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미드, 영드를 접한 후 다양한 드라마를 섭렵하는 데 빠져 있던 나는 직장생활을 할 때도 시간만 나면 집에서 뒹굴거리며 하루 종일 드라마를 보는 게 낙이었다. 한 시즌을 통째로 달리고 벌건 눈으로 잠이 들 때는 너무 한심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지옥철에 시달리며 퇴근을 한 후에는 도무지 다른 일을 할 기력이 나질 않았다.


내가 미드나 영드를 특히 더 선호했던 이유는 새로운 캐릭터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기 때문이었다. 판타지, 스릴러, 추리, SF, 드라마, 수사물, 코미디 등을 가리지 않고 즐겼는데, 편집자 3년 차일 때 보던 드라마는 <미란다>라는 영국 시트콤이었다. 


쪽팔림 경력 만렙, 덩치값 하는 미란다의 몸개그 작렬 쇼 <미란다> ⓒBBC


<미란다>의 주인공 미란다는 키 180cm, 나이 38세로, 제발 좀 아무나 잡아서 (정말로 말 그대로 ‘아무나’) 결혼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철들기를 거부하는 키덜트족이다. 게다가 있는 돈 다 털어 장난감 가게를 차린 후,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놀기의 내공을 쌓느라 바쁘다. 


 다 커서도 말달리기로 뛰어다니기 ⓒBBC
신나는 샤워기 놀이 ⓒBBC
혼자놀기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BBC
다 커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짓궂은 장난 ⓒBBC


드라이어로 쿠키 날려서 입에 넣기 ⓒBBC


혼자놀기의 정석, 춤추고 노래하기 ⓒBBC
‘혼자 놀기’의 필수품, 관객이 되어주는 과일&야채 친구들 ⓒBBC


대인관계 스킬이 부족한 미란다의 삶은 실수투성이라 공공장소에서 옷이 훌러덩 벗겨지거나 쪽팔리는 상황에 처하기 일쑤다. 잔뜩 긴장해서 헛소리를 하거나 예기치 않게 노출을 하는 등.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끔씩 상상하고는 등줄기에 진짬을 흘리게 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다.


좋아하는 남자랑 춤추는데 바지가 내려간다든가 ⓒBBC
긴장한 나머지 면접관 앞에서 열창을 한다든가 ⓒBBC
실수로 옷벗기 대회가 있다면 일등감 ⓒBBC
 데이트할 때 이렇게 되는 상상, 해본 적 없나요? ⓒBBC


특히 친구들과 만난 회전 초밥집에서 접시가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목걸이가 걸려 테이블 위를 아비규환으로 만드는 미란다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런 미란다의 연기가 너무 능청스러워서 어떤 이들은 <미란다>를 우울증 처방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드 <미란다> 중 회전 초밥집을 아비규환으로 만드는 중인 미란다. ©BBC  


대체 이 골 때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주인공인 미란다를 연기하는 미란다 하트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시트콤의 각본을 썼고 직접 프로듀서로도 참여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쇼를 만들었다고 했다. 찾아볼수록 참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대형서점의 외서 코너에서 우연히 낯이 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운명의 순간일까나?'


“어? 미란다가 책도 냈네?”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운명적인 섬광이 뇌리를 스쳤다든가 했다면 그럴듯했겠지만 그저 아주 미약한 두근거림을 느꼈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영국에서는 화제의 인물이었던 터라 책도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선정되는 등 꽤 인기가 있었다. 나도 한번 읽어나 볼까 하고 원서를 주문했다. 며칠 후 도착한 책을 읽어보니 시트콤에서 느꼈던 ‘미란다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직 한국에 안 나온 것 같은데, 이 책을 번역해보면 어떨까?’


다른 국내 출판사에서 이미 번역 중일 수도 있으므로 일단 원서의 번역 판권이 살아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출판사 이름인 Hodder 출판사를 검색해 보니 홈페이지가 나왔다. 홈페이지를 뒤적여 보니 ‘Rights’라는 항목이 보여서 클릭했더니 저작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골라서 메일을 보내면 되겠지 싶었는데 며칠 동안 고민만 하며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다가 밑져야 본전이니 보내 보자는 결심을 하고 담당자 이름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Anna Alexander라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맨 아래에 있으니 괜히 심리적으로 만만하다고 느껴져서.)


가끔 사람들에게 직접 번역을 해서 출판했다고 하면, 영미권에 유학을 다녀왔거나 영문학을 전공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실은 영국이나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영어 관련 전공을 한 것도 아닌지라 메일을 보낼 때 잔뜩 긴장했다. 정확한지도 알 수 없는 영작을 하기 시작했다. ‘I would like to buy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of <Is it just me?> by Mirand hart. 어쩌고 저쩌고…’ 


얼굴도 모르는 영국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다니… 출판사도 아닌 그냥 한국의 출판 관계자라고 보내면 그쪽에서는 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영어 문장이 이상해서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 별별 걱정을 하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내가 메일을 보냈던 영국 Hodder 출판사의 저작권 담당자인 Anna Alexander 씨. 2013년 당시에는 홈페이지에 사진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찾아보니 모든 담당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뒤늦게 메일을 주고받았던 사람의 얼굴을 보니 새삼 반갑다. 


메일을 보내고 난 후의 감정은 참 묘했다. 판권이 살아있었으면 좋겠는지 아닌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어쩔 건데?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등록하고 사업자도 만들어야 계약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출판사 이름도 또 뭐로 하고? 그냥 판권이 팔렸다고 답이 오는 게 낫겠다. 아예 답이 안 올지도 몰라… 그렇게 메일을 보낸 후 내 머릿속은 복잡한 경우의 수로 어지러웠다.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답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 걸, 바로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다른 말보다 판권이 살아있다는 내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Korean rights are available…” (한국어판 출판권이 살아있습니다)


국내 에이전시에서 번역 판권을 관리하고 있어서 앞으로 그쪽에서 연락이 갈 예정이라는 내용이 이어졌다. 아, 이제부터 한국 에이전시와 대화해야 한다니 겁이 덜컥 났다. 이제 진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5일 뒤에 한국 에이전시로부터 진행 여부를 알려달라는 메일이 왔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시간만 흘러갔고 2주 후에 또 한 번 결정을 재촉하는 메일이 왔다. 빨리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얼마나 고민을 했었는지 당시에 그렸던 낙서를 보면 새삼 생각이 난다.


책 계약을 마치고 그렸던 그림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알겠지만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미란다의 책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에이전시에 답장을 보낸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마포구청에 가서 출판사를 등록하고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 등록을 하러 뛰어다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더 이상 뒤로 후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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