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리 Jun 24. 2018

북디자인은 처음인데요

'마음을 다해 대충 만든' 표지

한 땀, 한 땀 조판 디자인


<미란다처럼>의 번역을 마친 후 1년 전에 배웠던 인디자인 수업을 더듬더듬 되짚어가면서 본문 디자인(조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절한 폰트 크기와 행간 크기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런 참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빡빡한 행간


조판을 하다가 가끔 마음대로 안 되고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는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하고 인디자인 책들을 찾아봐야 했다. 그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마치 할머니가 스마트폰을 처음 배울 때처럼 느리고 답답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행히 조금씩 폰트 크기와 행간을 수정하고 출력한 다음 비슷한 판형의 책들과 비교하다 보니 그럭저럭 읽기 편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작업 속도는 더뎠지만 서서히 꼴을 갖춰가는 본문을 보니 뿌듯했다. 게다가 책 판형에 맞춰 정리된 상태에서 읽어보니 워드 파일로 볼 때와는 달리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좌) 다양한 무료 폰트를 섞어 쓴 본문 / (우) '일러두기'에 사용한 무료 폰트 목록을 적어놓았다


유료 폰트를 구매해서 쓰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책에 쓰인 폰트는 모두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무료 폰트를 사용했다. 다행히 출판물에 써도 품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무료 폰트들이 조금씩 출시되고 있을 때라 나눔 명조, 배달의민족 주아체 등을 활용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책 앞 '일러두기' 부분에 이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적어놓기도 했다.


자, 본문 조판은 어찌어찌 완성해가고 있었지만 더욱 어려운 관문인 표지 디자인이 남아있었다.


책의 첫인상, 표지


'첫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처음 뇌리에 각인되는 '이미지'를 얼마나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는지 드러낸다. 책으로 치면 첫인상을 결정짓는 것은 책표지다. 내가 책에 돈을 쓸까 말까를 결정짓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책표지를 보는 몇 초 사이였던 것 같다. 물론 책 내용을 꼼꼼히 살펴볼 때도 있지만 실용서가 아닌 문학서적일 때는 특히나 책표지의 느낌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 중심적인 소통 방식이 대세가 되다 보니 출판사에서 북디자인에 들이는 정성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표지는 꽤 취향을 타는지라 출판사에서 책표지를 정할 때도 어떤 사람은 시안 A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시안 B가 좋다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의견이 달라서 굉장한 갈등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대부분 사장님 마음대로... 이긴 하다.


잠깐 개인적인 디자인 취향을 밝히자면 완벽한 대칭, 황금비율이나 반듯하게 정렬된 쪽보다는 어딘가 이상하고 삐뚤고 모난 쪽을 선호한다. 조금 조악할지라도 개성 있는 쪽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직접 만들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매력 있게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지만...)


물론 취향은 취향이고, 디자인 경력이 없는 내가 어느 정도 기본적인 구성은 갖춘 책표지를 만들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책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기존 출판물을 보면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책의 판형과 레이아웃을 참고했다. (판형 재는 법 : 자로 직접 잰다. <미란다처럼>의 판형은 146X225이다.) 그리고 최대한 제작 변수를 줄이기 위해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종이와 제작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한동안 책표지에 참고하려고 책장에 전시해놓고 살았던 책들


편집자와 디자이너 사이


책표지를 만들 때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 책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컨셉을 구체화하는 과정(제목과 카피를 뽑는 일 포함)과 그 컨셉을 이미지화하고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보통 편집자가 앞부분을 담당하고 디자이너가 뒷부분을 담당한다. 보통은 이 과정이 순서대로 이루어지는데, 나는 혼자서 번역-편집-디자인까지 스트레이트로 하려다 보니 역할이 섞여버려서 한동안 혼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제목을 고민하다가 부제목을 고민하고 본문을 조판하다가 다시 표지를 고민하다 보니 낙서는 늘어가고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책을 편집하는 사이, 사이 생각난 제목이나 카피를 적었던 쪽지들
표지! 제목! 그것이 문제로다! 항상, 얼웨이즈!


그때 고민했던 제목 시안을 구글 문서에 올려두었는데, 지금 와서 80줄가량 되는 목록을 살펴보니 참 웃음이 난다. 당시 어지러웠던 내 머릿속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것은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의식의 카오스.)


후보로 올랐던 두 가지 제목


제목이 정해진 후에는 일단 무작정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중간에 함정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몇 가지 그림은 잘 그리는 사람이 그려줬다.)


이때는 단순 무식하게 '제목 크게!!!! 미란다 얼굴 크게!!!!' 정도가 컨셉이었던지라 아주 엉성한 이미지들이 쏟아졌었다. 한정된 면적 위에 정해진 글자와 이미지를 배치하는 일 - 구도, 비율, 컬러, 배치... 제목 하나를 살짝 옆으로 옮겨도 전체적인 느낌이 전혀 달라졌고 무엇 하나 정돈된 느낌이 나지 않았다. 컨셉과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디자인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정신이 아득해졌다.


끝나지 않는 표지 방황기


처음 스케치한 것 중에서 미란다의 장난감 가게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서 작게 출력을 해보았다.


북디자인은 '책'을 디자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평면이 아니라 책이라는 입체적인 물건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서 디자인해야 한다. 하지만 디자인이 처음인 나에게 그런 게 실감이 날 리가 없지. 그러니 이렇게 입체 상태로 뽑아보니 또 다른 느낌이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게가다 나중에는 모니터 화면이 아니라 질감이 있는 종이에 인쇄가 될 예정이니 그것까지 상상하려니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나중 일까지 생각하기에는 머릿속에 공간이 없었기에 일단 최대한 느낌이 오는(?) 표지가 나올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 손글씨를 써서 스캔해 보기도 하고 포토샵에서 직접 그려서 넣기도 했다. 컬러도 이것저것 넣어봤다.



경쾌하게!! 유쾌하게!!의 강박 덕분에 탄생한 어딘가 청소년 소설 같은 표지. (청소년 소설 무시하는 거 아니고요.)



아예 방향을 바꿔서 정신없는 그림을 다 빼고 미란다만 남겼던 표지들. 갑자기 심플한 느낌이 되었다. 근데 왠지 혼자 말달리기 하는 미란다는 좀 쓸쓸해 보였다.


좋은 표지의 기준


이쯤에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그때 단점을 발견하면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려서 컨셉이 점점 다듬어지는 게 아니라 조잡한 시안만 늘어가는 느낌이었다. 대체 '최선의 표지'는 무엇일까? 독자의 입장으로 책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책표지에 이끌려 책을 펼쳤다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 실망했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일단 겉포장은 내용물을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출출한 밤 편의점에서 과자를 고르다가 포장지를 보고 이런 기대감을 품을 때가 있다.



'음... 뭔가 매끈매끈하고 파사삭한 식감에 추로스 맛이 나는 과자일까?'


그런데 막상 뜯어보니 이런 비주얼이 튀어나오는 거다.


아... 이거 그냥 '긴 짱구' 과자 아니야?


나에게는 표지가 책의 내용과 얼마나 호응하는가가 좋은 표지의 기준이었다. 책을 집기 전에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책표지라면 그냥 흰 바탕에 검은 글씨만 찍혀 있더라도 좋은 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마다 '좋은 표지'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직접 책을 만드는 이유 중에는 다른 사람의 기준보다 '나의 기준'을 존중하고 그걸 따르고 싶은 의도도 있었는데, 정작 직접 책을 만들 때는 그 부분을 망각했던 것이다.


막상 표지를 만들려고 보니 미란다의 '재미있음'과 '인지도'를 드러내고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발목을 잡혀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표지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았다.


- 책의 내용을 하나의 이미지로 느낄 수 있도록

- 책덕 출판사의 (혹시 있을지 모를) 다음 책과의 연결성

- 다 드러내기보다는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디자인


물론 이렇게 정리한다고 해서 좋은 표지가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손이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머리로 안다고 해서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은 균형의 문제였다.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포기한 대신 내가 집어넣고 싶은 것은 '책덕스러움'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아마추어스럽게 만들 수도 없었다. 이 책은 엄연히 '상품'이니까. 상품을 만들 때는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자기감정을 떡칠해놓고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혼자 즐기는 덕질일 때는 상관이 없었겠지만 누군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돈을 지불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어느 정도 중간 지점을 찾아야 했다.


어떤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아무도 대신 결정해 주지 않는다


혼자 책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모든 판단이 내 몫이라는 뜻이다. 책을 만들 때는 결정을 내리는 타이밍도 무척 중요하다. 고민하는 시간은 집중해서 빡세게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든 비판과 책임도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것이 1인 출판의 장점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단점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런 것(?)인데, 비단 출판에만 국한되지 않는 독립 일꾼의 숙명이랄까.


최종적으로 두 가지 디자인으로 후보가 좁혀졌다. 고민 끝에 SNS에서 투표를 받아보았는데,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견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조언을 수백 개 받아도 결정은 결국 내 몫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표지 시안 두 가지


'머리맡에 놓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느낌이 오는 것으로 결정하자.'


'에라, 모르겠다!'하고 막판 선택을 받은 표지는 갈색 바닥에 미란다의 장난감 가게가 그려진 디자인이었다. 가게 그림은 내가 그리고 미란다 캐릭터는 짝꿍이 그려주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차린 출판사이기에 남의 기준보다는 내 기준에 따라 책을 만든다. 누군가의 허락이 익숙했었기에 홀로 오롯이 판단하는 일은 왠지 거센 바람을 맨 앞에서 맞으며 앞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듯하다. 누군가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고 지적을 해도 남 탓을 할 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나는 너무나 서툴고 부족하지만 세상에 이미 존재하던 스타일이 아니라 내 스타일로 출판 시장의 구석탱이를 하나라도 물들이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 짝꿍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책의 부제는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 철학을 그대로 표현하는 말이다.


매력적인 그림이란 그저 잘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런 걸 그려가고 싶습니다.

- 『안자이 미즈마루』 중에서


누구보다 잘할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 나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니까. 오늘도 마음을 다해 대충 만든 책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전 03화 먹고사니즘과 첫번역니즘 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