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된 책덕의 탄생
IT 전문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찼다. 책이 만들어지기 전 저자, 역자들과 만나서 기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원고를 다듬는 일도 재밌었고 인쇄소에 들러 책이 실제로 제작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자리에 내가 없더라도 거의 비슷한 책이 만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직접 내 손으로 내 의도를 담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욕구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을 뿐 행동으로 옮겨가진 않았다. 여전히 회사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적당히 일을 하는 일상이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사이로 '번역이 하고 싶다'든가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다'라든가 하는 욕구가 불쑥 머리를 내밀 때가 잦아지기는 했지만 아무런 경력이 없는, 고작 편집자 3년 차인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흐릿하기만 했다.
오래전부터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아무' 것이나 번역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 취미로 오래된 미국 드라마 자막을 번역하거나 짧은 에세이를 번역하곤 했다. 낯설게 다가오던 영어 문장을 단어 하나, 하나 맥락을 파악해가며 옮기는 과정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번역을 마친 글 전체를 다시 읽을 때의 성취감은 정말 대단했다. 그렇게 나의 욕망은 '[번역]을 하고 싶다'에서 '[내가 번역하고 싶은 것]을 번역하고 싶다'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대형서점 외서 코너에서 즐겨보던 영국 드라마 <미란다>의 각본가이자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미란다 하트'의 책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가볍게 상상했다. '이 책을 직접 번역해서 출판해보면 어떨까?' 그런데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책이 나의 관심사였던 '여성' '유머' '다양성'이라는 키워드에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먹긴 했지만 막상 처음으로 해외 출판사에 판권 계약에 대해 문의를 하려고 보니 망설여졌다. 아직 직장인 신분이기도 했고 고민이 있어도 혼자 끙끙 앓는 성격이라 인터넷에서 매일 몇 시간씩 출판에 대해 검색을 하며 결심이 서기를 기다렸다. 뭐랄까, '1인 출판사를 차릴 거야!'라기보다는 '이 책을 직접 번역해서 만들어볼까 해' 정도의 개인적 실험이라는 생각에 주변에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듣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하기 전부터 내게 조언을 많이 해주던 직장 선배에게 이야기를 했다. 예상했던 대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직접 하면 힘들어질 테니 그냥 출판사에서 경력 쌓아서 전문 편집자로 커리어를 이어가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오랜 시간 동안 몸담아왔던 출판 시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1인 출판 관련 카페인 '꿈꾸는 책공장'의 공지에는 2008년에 쓰인 '자기 책 한 권을 내려고 출판사를 창업하신다면...'이라는 글이 걸려 있다. 1인 출판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1인 출판의 현실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아주 정성스러운 글이다. 글의 마지막에는 '회원수 10만 이상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거나 하루 실 유입 1000명 이상의 카페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거나 마케팅 전문가거나 출판 경력이 3년 이상이거나 금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출판사를 차리지 말라'라고 단호하게 조언한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쓰인 이 글에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공감 댓글이 달리고 있다.
역시 어딜 봐도 흔쾌히 출판을 하라는 말은 없었다. '책이 안 팔린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새삼스럽게 입밖에 내기도 민망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감정이 저 밑에서 올라왔다. ‘팔리는 책’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에 세뇌당하는 와중에도 ‘그래? 그럼 뭘 만들어도 안 팔릴 테니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내 마음대로 한번 만들어보지, 뭐’라는 반발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출판에 쓸 수 있는 돈은 퇴직금 600만 원. 처음에 필요한 돈은 선인세 240만 원과 저작 중개료 33만 원. 모든 작업은 집에서 내 손으로 직접 하고, 꼭 필요한 비용만 지출할 예정이었다. 너무 궁색하지는 않게, 최대한 즐겁게.
번역을 직접 해서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후, 처음으로 한 일은 출판사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왜 '책덕'이라는 이름이 나왔는지 지금에 와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복덕방'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감 어린 감성이 좋아서 '북(book)덕방'이 나오고 그러다가 책덕방이 나왔다가 뭔가 출판사 이름으로는 깔끔한 게 나을 것 같아서 '책덕'이 되지 않았나 하고 추측할 뿐이다. 사람들마다 '책덕후' '책 덕분에' '책으로 덕을 쌓는다'라는 식으로 다양한 해석을 해주곤 하는데, 가끔 전화로 출판사 이름을 말할 때 '책떡'이라고 발음이 되는 걸 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몇 날 며칠을 밖에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혼자 잘 노는 나는 예전부터 방구석에 갇혀 꼼지락거리는 내 모습을 세 개의 선으로 형상화하곤 했다. 아직 쓸 곳은 별로 없었지만 그런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명함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디자인을 하고 보니 직함을 넣는 곳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출판사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출판 실험을 하는 프리랜서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표'라든지 그런 거창하고 딱딱한 직함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일을 의뢰받을 때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독립 일꾼'이라는 별명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독립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별명이었던 '독립 일꾼이' 좀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독립투사 같은 느낌, 혼자 진지한 느낌!) 그래서 다음 명함을 찍을 때는 '자유 일꾼'이라는 별명으로 바꾸었다. 프리랜서의 말장난 같지만 최대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자유 의지대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먹고 살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다. (과연?)
책을 만들면 책등에 들어갈 출판사 로고를 또 빠뜨릴 수 없어서 어떻게 디자인할까 고민에 빠졌다. '씸뽈 이즈 더 베스트'를 떠올리며 '책덕'의 초성만 따서 'ㅊㄷ'으로 만들었다. 명함을 찍고 나서 어차피 한동안 뿌릴 곳이 없으니 낙서를 하며 가지고 놀기도 했는데…
로고를 계속 보다 보니 어째 이거... 불길한 한자가 떠오른다.
大亡?!
대망?!
아니, 왜 이런 헛것이 보이나. 도리도리(눈을 쓱쓱 문지르고) 그래... 아니야. 디귿은 디귿이지, '망' 자처럼 위에 꼭다리가 없는 걸. 애써 '망한다'는 말을 외면하다가 브런치에 들어가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제목을 타이핑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후로는 그저 이 한 권의 책을 내 힘으로 끝까지 만들어서 잘 파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책덕의 자기중심적 출판이 시작되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