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출판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 앞에서 만난 사람들
책덕 출판사를 등록한 것이 2013년, 그동안 만든 책은 5종. 그중 2쇄를 찍은 책은 <미란다처럼> 1종뿐이다. 어차피 자유일꾼으로서(!) 출판과 다른 일을 병행하려고 했고 그럭저럭 계획대로 살고는 있지만 생각만큼 책이 팔리지 않는 날에는 '왜 책을 만들지? 굳이 책을 만들어야 하나?'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스물스물 또아리를 튼다.
책을 낼 때마다 그 질문을 스스로 반복하다 보면 '이제 그만 할까?'라는 생각도 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매너리즘인지 번아웃인지 모를 파도를 맞이해 꽤 지쳐있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출판 문의 메일은 가끔씩 들어오는 편이라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불 번역사이자 자음과 모음에서 펴낸 '도쿄 산보'를 번역한 최유정이라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첫 책을 번역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는 별다른 번역서가 없고, 외서 번역 기획서도 두세번 써봤지만 기회가 없어 출판 번역을 포기하고 있던 중 대표님의 "이것도 출판이라고" 책을 읽고 용기를 얻고, 유용한 정보도 많이 배워 정말 번역해보고 싶은 책의 작가님들께 상습적(?)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국 코미디에 관심이 있으시니 이미 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몇 년 전 브릿튼즈 갓 탤런트에서 우승한 Lost Voice Guy 리 리들리의 첫 책이 작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동작구의 한 장애인자립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번역가 양성과정과 연이 닿아서 (출판 여부와 관계 없이 교육용으로) 이 책을 번역/감수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표님 책에서처럼, '외서 번역판권, 한 번 알아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작가의 홈페이지, 인스타 DM, 작가의 에이전트 여러 채널로 연락을 취한 결과 상기 책의 한국어 번역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이 책의 출판을 희망하는 출판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여러 권의 책 중 하나로 출판되는 것이 아닌, 영국 코미디언의 감성, 소위 '장애 드립'의 감성까지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펴낼 곳이 어디일지 고민해보니, 책덕 출판사와, 판권 문의를 할 용기를 주신 대표님이 생각났습니다.
갑작스러운 문의에 당황스러우실 것 같지만 염치 없이 이메일을 드립니다. 혹시나 연락드릴 수 있는 번호를 주시면 연락을 드리거나 사무실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코로나로 불안하시면 온라인 미팅도 괜찮습니다 ^^ 검토 의견을 이메일로 간단히 회신 주셔도 괜찮습니다.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편히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대표님의 열정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최유정 올림
우선 아무 출판사나 걸리고 보라는 식의 '묻지마 투고'가 아닌 정확히 책덕을 정조준한 메일이었기에 +10점, 게다가 <이것도 출판이라고>를 읽으셨다니 가산점(?) +10점을 드리고 메일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다만 나는 리 리들리를 이 메일을 통해 처음 알았기 때문에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영상을 몇 개 찾아보니 과연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우승할 만큼 재치 있고 뛰어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다. 기존에 내가 좋아하던 코미디언들처럼 자신의 소수자성을 잘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데다가 더불의 사회의 모순까지 자연스레 들여다보게 하는 개그 솜씨가 일품이었다. 게다가 장애인 코미디언이 쓴 책을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 당사자들이 번역을 한다고 하니 그 여정을 함께 해보고픈 욕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책덕의 코믹 릴리프 시리즈는 여성 코미디언의 에세이로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만약 출판한다면 시리즈에 넣지 않고 내야 할까 라는 고민이 듦과 동시에, 아니, 그보다 앞서서 과연 이 책을 내가 출판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진심이 담긴 메일을 단번에 거절하기는 어려워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당시에 <로스트 보이스 가이>는 아직 번역 중이었고, 나는 책덕의 다섯 번째 책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 출간 마무리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후에 만나기로 했다.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는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하던 내가 처음으로 역할을 나누고 협업을 통해 출판한 프로젝트였다. 일명 가위바위보 프로젝트라고, '가위바위보 계약서'를 쓰고 세 명이서 함께 책을 만들고 텀블벅 펀딩을 진행했다. 혼자 일하는 데 익숙했던 데다가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아서인지 이 책을 만들면서 나도 모르게 많이 지쳤던 것 같다. 책을 다 만들고 보니 또 이렇게 협업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덜컥 겁이 났다.
https://brunch.co.kr/@brunch8m3s/157
게다가 이번에는 참여 인원도 더 많고 장애인 코미디언이 쓴 책을 장애 당사자들이 직접 번역하는 뜻깊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부담이 됐다. 지금까지 번역해 출간한 책은 내 정체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번 책은 백인 장애인 남성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게다가 선인세도 겨우 감당하는 수준인 1인출판사에서 내는 것보다는 마케팅 자원이 조금 더 풍부한 큰 규모의 출판사에서 내는 것이 기획자(피아바나나)와 번역가들(우리동장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입장에서도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나니 이 투고는 거절을 해야 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도망을 참 잘 치는 성격이다. 1인출판을 한 것도 나 혼자 해보고 말아먹으면 그냥 나 혼자 감당하면 되니까 방구석에서 시작을 했던 게 컸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도망쳐 보자, 하는 마음으로 최유정&김헌용(피아바나나) 두 분을 만나러 나갔다.
잠깐 두 사람을 소개하자면 통번역대에서 만나 마다가스카르 여행을 포함해 온갖 산전수전을 함께 겪고 직장인밴드 번아웃밴드의 키보드와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는 핵인싸(이런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나서 죄송합니다) 커플이다. 아, 올해 5월에 결혼을 했으니 부부라고 소개을 해야 겠군. 두 사람의 매력은 직접 만나야 표현이 가능한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 영상으로 떼워야 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9YywY_KpKM8&feature=emb_title
두 사람과의 첫 만남은 내가 일하고 있는 마포출판문화센터 플랫폼피에서 이루어졌다. 어떻게 하면 잘 거절할까를 고민해 간 나는 이 책을 내기에 꽤 색이 잘 맞아 보이는 출판사를 몇 군데 소개하면서 그쪽에서 출판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쪽을 추천하는 것은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울증도 앓고 있고 자신이 조금 없다는 이야기도 솔직해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기억을 못했는데, 얼마 전 헌용 님이 그런 솔직한 이야기가 오히려 책덕에서 내고픈 마음을 들게 해줬다고 해서 내가 별 말을 다했구나~ 했다.)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덕에서 내고 싶다고 말을 해주었다. 일반적인 번역가&감수자의 역할에만 머무르기보다는 책덕의 파트너로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끌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두 사람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마음이 굉장히 복잡했다. 내 마음 한쪽에서는 <로스트 보이스 가이>라는 책을 함께 만들어갈 계획을 한참 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거절하고 도망을 쳐서 방구석에 숨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끔 1인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강연을 하러 간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권하지 못한다면서도 좋은 점을 꼽으라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든 출판사 이름으로 누군가를 직접 선택해 출판에 참여할 기회를 줄 수 있고 그 기회를 빌미로 삼아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며 내 삶을 채울 수 있다는 부분이 포기하기 어렵다고. 어쩌면 그 자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과 하며 사는 자유를 위해 1인출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는 <로스트 보이스 가이>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불구덩이(라고 표현하면 좀 오바스럽지만) 속으로 밀어넣었다.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나(INFJ)에게 예측불가능한 책 만들기가 어떤 고난과 역경과 즐거움을 줄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진 책덕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 찾아온,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일지도 모르겠다.
“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몸소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망이 특기요, 관계 자르기가 취미였던 나에게 출판이라는 일은 결국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방구석에서 뛰쳐나와 세상의 구석에서 살아남기.
- <이것도 출판이라고> 서문 중에서
[책덕의 회신]
유정 님, 일요일에 잘 들어가셨죠?
어떻게 연락을 드릴까 하다가 밤이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드리려고 메일을 드립니다.
리 리들리의 책을 책덕에서 출간해보려고 합니다.
에이전시랑 계약 진행하면서 상황 공유해 드릴게요.
작업 일정이랑 기타 세부 사항은 3월에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유정 님의 회신]
대표님 안녕하세요!
일요일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얘기 나누는 시간 즐거웠습니다 ^^ 기쁜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고민하셨을텐데 함께 하는 결론 내려주셔서 감사하고 진심으로 기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번역 마무리하고 출판 준비도 저희가 할 수 있는 부분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3월에 뵈어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최유정 드림
책덕X피아바나나X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함께하는
"세상에 없던 이상한 코미디언, 로스트 보이스 가이" 출판 프로젝트 텀블벅으로 초대합니다.
텀블벅 한정으로 준비한 번역가의 문장 책갈피와 제리백 콜라보 리플렉터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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