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콰한 밤, 봄날의 티셔츠

by 김선태

불콰하게 취한 친구는 터진 입 속에 혀를 끝없이 놀렸다. "사람이 너무 몹쓸 짓을 많이 하는 것 같아. 간사하다고 해야 하나? 너무 짓밟고 서로 짓밟고" 친구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듣다 쏘맥 잔을 내려놓으며 나도 한 마디를 보탰다. "야 친구야. 간사하다기보다는 추접하다는 표현이 좀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말여 사람만 짓밟는 게 아녀. 아마존 정글 있잖아. 아마존 정글의 하늘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는 순간! 주변 나무들의 성장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는겨. 허기사 갸들은 다리 걸고 속이고 허진 않지. 니 말이 맞네."

그렇게 친구와 열띤 인문학 쏘맥을 맛나게 먹고 자전거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밤바람 가르며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마구 뱉어냈다.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그 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물론 신호등 앞에서는 작게 흥얼거렸다. 기분 좋은 친구와 한 잔 한 나는 정글의 치타보다 나무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갸들은 쏘맥 맛을 모른다.


친구와 불타는 금요일을 행복하게 보내고 다음 날이 되었다. 동민이 운동화 수선이 다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나는 마트로 향했다. 하은이가 부탁한 샴푸도 하나 살 계획이었다. 우리의 임무가 완료되는 순간 아내가 나에게 반팔 티셔츠 하나를 사준단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 반팔 세 개를 획득했다. 내일부터 깔끔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까 싶다. 난 아내의 깜짝 제안에도 시큰둥한 자세로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아내는 이 집 저 집에 걸려있는 옷을 살폈고 난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물론 살짝 흔들었다. "여보! 안 살래" 하지만 아내에게 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는 나를 지나쳐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나의 귀한 외모에 어울리는 옷은 찾기 어려웠다. 아내와 난 다음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봄날 벚꽃보다 밝아졌다. 나는 자연스레 아내의 눈빛을 쫓아갔다. 거기에는 나의 경쟁자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아내가 솔찬히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녀석이라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아내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아내가 웃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녀석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아내가 한마디를 했고 내 동공은 커졌다. "여보! 지성 머리 떼어서 당신 얼굴에 씌우고 싶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아내의 강력한 한방이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아내는 마지못해 웃는 나의 귀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 되겠네. 여기 걸리겠어!" 들리는 소문에, 행사가 끝나면 지성 머리를 아내에게 주겠다 하고 아내는 살짝 사양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성보단 내가 좋은가 보다. 참고로 이 집에서 티 하나를 샀다.


이 글을 쓴지 9년이 흘렀다. 아내는 지성을 여전히 좋아한다. 물론 나를 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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