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다 질
기업에서 며칠 씩 고민하여 만든 두꺼운 보고서에 오탈자는 없는지 여러 번 들여다보고 예쁘게 출력하여 상사에게 보고하면 흔히 듣게 되는 소리...
"요점이 뭐지?" "결론이 뭐냐?" "그래서 뭘 하자는 얘기지?"
그렇다.
기업에서는 아무리 두꺼운 보고서라 하더라도 맨 위에 있는 Executive Summary라 하는 첫 장에 핵심 내용이 다 들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 위와 같은 질문이 나올 것을 대비해 머리 속에 답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만든 보고서를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두꺼운 보고서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일단, 위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오지 않거나 1장으로 된 보고서에 윗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그 다음 보고서 내용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종이 뭉치에 불과하게 된다.
"좋아하면 판단하지 않는다."
'장정빈의 병영칼럼'에서 훌륭한 리더나 영업의 달인은 상대의 호감을 얻는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그렇다. 기업에서도 자신이 신뢰하는 부하가 가져오는 문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이 신뢰하는 직원이 보고서를 가져올 때 하는 몇 마디 말은, "문제 없지? 이대로 하면 되는거지?" 정도다. 그리고는 문서는 대충 보고, 대신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말과 함께 서명을 한다.
학교에서 논술형 중간고사 시험 채점을 하면서도 비슷한 점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중간고사 문제를 논술형으로 출제해 왔다. 객관식으로 출제를 하면 문제를 구성하기는 힘들어도 채점도 쉽고 채점 결과에 대해 학생들의 이의를 원천 차단할 수 있으므로 객관식 출제를 선호하는 교수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의 생각을 객관화 할 정도로 문제를 낼 자신도 없거니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대량생산시스템에 적합한 인력 선발 잣대로 발달해온 미국의 객관식 출제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전히 주관식을 고집하고 있다.
주관식 문제의 채점은 채점의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가능하면 1번 문항을 모두 채점하고 다시 2번 문항을 채점하는 식으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채점 기준을 미리 설정한 뒤 학생들에게도 오픈하고 시작한다. 문항별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핵심 단어와 핵심 논점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예 틀린 답을 쓴 학생의 경우는 고민할 게 없으나, 어떤 학생은 핵심 주위를 맴돌면서 두리뭉술하게 서술했거나 비슷한 개념을 적은 학생들에게는 아무래도 나의 주관이 반영된 채점을 배제하기 어렵다.
답에서 원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유사한 용어를 사용하거나 서술의 앞부분은 맞지만 추가적으로 더 적은 글에서 틀리게 기술한 학생의 답안을 만날때는 점수를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그 학생의 평소 수업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소 수업을 빠지지 않고 에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호응을 한 학생에게는 우호적인 잣대로 평가하지만, 요령을 피우고 수업도 게을리 하는 학생의 경우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직장과 마찬가지다. 심하게 말하면, 신뢰하거나 좋아하는 학생의 답안은 '판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사는 세계의 원리는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 태도로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문제를 넘어 답안 작성에는 기본적인 몇 가지 요령이 있다. 모든 문항에는 그 문항이 요구하는 핵심 단어가 있다. 그 단어를 먼저 적어두고 문장을 구성해야 핵심개념을 빠트리지 않고 간결하게 답안을 적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답안 작성부터 시작해서 두리뭉술하게 많이 적는다는 것은 답을 모른다는 다른 표현이 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노력점수를 받는데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채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감점을 맞을 각오도 해야 한다.
시험답안을 비롯해 모든 글은 쉽게 쓰야 한다. 전문가들 끼리의 소통이 아니라면 굳이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말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그 글을 읽는 상대입장에서 써야 한다. 쓸데 없이 정확히 모르는 한자를 사용하여 무식을 폭로하는 일도 없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냥 '기획안'이라 하면 될 것을 굳이 '기획(安)' 이라고 하여 바보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기본적인 맞춤법이 틀려서는 곤란한다. 맞춤법 퀴즈에나 나올법한 애매한 띄어쓰기나 아주 어려운 단어인 경우는 국문학과를 나오지 않는 한 제대로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자주 쓰이는 기본적인 단어에 해당하는 역할, 결재와 결제 구분과 같은 것을 틀리게 되면 기본적인 소양을 의심 받는다. 회사에서 몇 번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그 직원을 신뢰하기 힘들게 된다.
또한, 문장은 단문이 좋다. 나도 초창기 글 쓰기가 익숙치 않을 때는 긴 글을 쓰야 멋있어 보이고 글을 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비즈니스 글쓰기나 학교에서 답안을 작성하는 글을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문학적인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전달이 핵심이다. 그런데 글이 길어져 복문, 중문이 되면 주어와 술어가 틀리기도 하고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내용의 주어를 놓쳐버려 전체적인 의미 파악이 힘들게 된다. 가능하면 단문으로 여러 번 작성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보고서나 답안 내용은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것이 좋다. 개조식이란 서술식의 반대어로 내용을 풀어서 길게 쓰지 않고 핵심요소만 간추려서 항목별로 나열하는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앞에서 언급한 글쓰는 방법을 개조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읽는 대상 관점에서 작성한다.
답안이나 문장을 작성할 때에는 서로 중복되거나 빠트리는 내용이 없어야 한다. 가령 "동물은 포유류와 파충류 조류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했다면 이 말에는 중복되지는 않았지만 양서류를 빠뜨린 문장으로 틀린 문장이 된다. 그리고 "사람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직장인이 있다."란 문장이 있다면 여기서는 빠뜨린 것은 없지만 직장인 속에는 남성 직장인과 여성직장인이 중복되어 있으므로 잘못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중복하지 말고 누락하지 말자는 원칙을 MECE(Mutually Exclusively Collectively Exhaustive)원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룹화를 잘해야 한다. 어떤 제품의 장점을 10가지를 나열해 두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언뜻 보기도 어지러울 뿐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10가지를 그룹화 해서 3~4가지 정도 단위로 묶어서 정리해야 이해하기가 쉽다. 예를 들어 이 제품의 장점을 세가지, 즉 경제적관점과 사용용도 관점, 그리고 디자인 관점에서 분류해 10가지를 배치하게 되면 기억하기 쉬워진다. 이처럼 가짓수가 많은 경우에는 그룹화를 잘해서 표현해야 본인이 기억하기도 좋고 상대에게 어필하기도 좋다.
보고서를 쓴다던지 대중에게 쓰는 글이라면 제목도 중요하다. 제목에는 그 보고서의 목적과 내용의 범위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어야 제목만 보고서도 무슨 내용인지 있게 된다. 독자를 대상으로 쓰는 글이라면 제목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자신이 쓴 글은 대중에게 읽혀질 수 없다. 제목은 글내용을 나타내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제목을 보고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야 하며 그 다음 요약된 내용을 보고 보고서 내용이 궁금해야 자신이 고생한 보고서나 문서가 독자(교수)에게 읽혀지는 것이다. 보고서의 큰 제목부터 중간 중간을 차지하는 중소 제목들은 집으로 보면 기둥이나 골격의 역할을 하므로 잘 구성된 제목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 무너지듯 보고서나 문서도 무너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독자(교수)에게 읽혀지지 않게 된다.
어쨌든, 학교 시험에서는 평소 수업태도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답안이나 문서 작성요령을 잘 알아야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