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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눈 Aug 04. 2021

그대들에게

조그마한 안식처로 남기를

고등학생 시절, 스스로 과외선생님을

수소문해 글이라는 것을 배워 본적이 있다.
절대 저렴하다 할 수 없을만한 가격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번씩 그 가르침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었다.

매 수업마다 한 주제를 가지고

백일장 형식으로 10장 이내의 단편소설을 쓰게끔 하셨는데, 단 한 가지 주의를 주셨다.

소설 내에 죽음에 관한 것을 나타내지 말라고.



물론 입시 백일장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청소년들의 희망적이고

밝은 글들을 원할 것이고

또, 청소년에겐 그런 우중충한 분위기의 소설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임은

이제야 조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내 생에 첫 전국 백일장에서 쓰인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은

내가 1등임을 자신했음에도 불구하고

3등에 그치고 말았으니.

그때의 좌절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해 1등의 운문이 낭송되던 그 순간에도

내 글이 저 글보다는 뛰어난 게 틀림없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 운문은 매우 보편적인

청소년만의 해맑음을 보여주던 그런 글이었다. 그런 밝음을 원하던 심사위원들이 대다수였고 때문에 꽤나 심오했던 내 글은

그런 성적에 그칠 수밖에.




나는 그런 경험을 하고도

나만이 지닌 감성을 고집하고 싶었다.
선생님께선 나에게 어떠한 주제를

여느 때와 같이 주셨고,

나는 죽음에 관한 걸 암시하는

어떠한 것도 넣지 말라던 선생님의 말씀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신,

그 주제에 맞춰 써 내려간 소설 속에

죽음이란 것을 내포하였고

그 글을 본 선생님께선

자기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기분 나쁜 듯 미미한 화를 내셨다.

그리고선 다시 다른 글을 써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 이후 다시 그 선생님을

마주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죽음이란 누군가에겐 두렵고

꺼림칙한 현상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안식처로 느껴질 만큼의

편안함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면이 존재하는 죽음이란 것을

왜 선생님께선 오로지 배제만을 하길 원하셨는지 그때의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소설 속 누군가의 죽음은

대부분 다른 인물들의 후회나 깨달음을

이끌어냈고 그 당사자에겐

편안함을 선사하듯 나타나 있었다.
그런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음에도

내 글은 그저 우중충한,

절망적인 글로밖에 읽히지 않으셨던 걸까.


소설은 독자의 시선과 작가의 시선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 의미를 표현했음에도 그 의미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선생님을

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모든 사람들이 희망적이고

밝은 글들에 위로를 받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은

자신이 우울한 시점, 자신과 닮아있는 분위기의 글들을 보고서 공감이 쏟아져 나와

울음과 함께 스트레스를 배출해내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소수의 어떠한 이들을.
조금 시간이 지나간 지금 이 나이에도

내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날 받아들이지 못한 그 누군가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시야가 생겼을 뿐.

나의 가치관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전혀 희망적이지 않고

우중충한 나날들만 계속되는

끝없는 우울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포함한 그대들에게,

내 글이 조그마한 안식처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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