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첫눈 Jul 07. 2020

무채색

모두 까맣게 덧칠해졌으면

숨이 막혀오는데도
숨이 쉬어져
어쩔 수 없이 살아있다.

숨이 그냥 멎어버리기를 바람과
그로 인해

이 분노와 서러움과 아픔으로 가득 찬

생각들 역시도 한순간에 색칠해지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무채색으로.
그중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검은색으로.



그렇게 된다면
내 이름만을 사랑스럽게 불러대던 네가
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던
그 목소리도


나만을 예쁘게 뚫어져라 바라보던 네가
내 앞에서 그의 이름을 숨기려 굴리던
그 눈동자도


나와 했던 약속까지 변명으로 들먹이며
끝까지 거짓말을 하던
너의 그 가증스러운 말들도.

모두 까맣게 덧칠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사라지겠지.




처음부터 차라리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인 마냥
나를 보며 웃어주지 않았더라면,
울어주지 않았더라면,
안아주지 않았더라면,
최선을 다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너를 내치려 마음먹고서
너를 밀어냈을 때
너 역시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양
뒤돌아서 나를 떠났더라면

그랬더라면


네 웃는 모습이, 우는 모습이,
다정한 목소리가, 네 품의 그 온기가
나만 알던 너의 그 살 냄새가,
나만 향하던 그 사랑스러운 시선이,
나만 향하던 너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내 앞에 아른거리진 않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날 아프게 하진 않았을 텐데.


네가 남긴 추억들은
내 안에 뚜렷하게 착색되어

몇 번을 세게 문대어도

색이 오히려 번져만 간다.




네가 없는 나는 한없이 우울하다.
외롭고 적막한 시간 속에 갇혀있다.

네가 나를 극도의 행복에서 뛰놀게 했던 탓에
내가 원래 이렇게도 어두운 사람이란 걸
잠시 잊었었다.


모든 빛을 흡수해 덮어버리는

검은색인 내가

마치 오색찬란 무지개인 줄로만

착각하고서.



다시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려준 네 덕분에
나는 이게 원래 내 위치였다는 걸 깨달아.

괜찮다. 그저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것뿐이니.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잠식하는 최대한의 불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