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프닝 없이는 완전하지 않잖아?
떠나기 이틀 정도 전부터 이유 모르게 짜증이 치솟았다. pms 같기도 하고, 남편이 하는 짓이 다 맘에 안 드는 데다가 꼬박 열흘 넘게 개가 남의 집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싫고, 여행 가서 잔고 싹 털어버리는 것도 싫고, 어쨌든 설렘은 한없이 영에 가까운 상태였다. 어쨌든 오후 늦은 비행기라서 집 정리와 짐 싸기는 당일 다 하기로 했다. 남편은 눈 뜨자마자 세탁실에 갔고, 나는 아침 베이글과 점심 주먹밥을 한꺼번에 준비했다. 집 청소를 다 마칠 때쯤 세탁 마친 옷들이 돌아와서 셋이서 각자 짐을 챙겼다. 이거 하나는 굳은 맘으로 내가 해주지 않아 버릇해서 두 아들이 자기 손으로 결정해서 싼다.
개는 여름 여행 두 번 동안 Dogvacay를 통해 찾은 시터에게 가게 되는데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나의 불안은 거의 하늘을 찔렀다. 이상하게도 애 어렸을 때 어디 다녀올 경우 울 엄마한테 맡긴 건 하나도 슬프거나 불안하지 않았건만 미치도록 우울했다. 생각해보면 개를 가족으로 맞아들인 후에 이렇게 장기간 헤어진 일은 없었다. 가장 긴 게 5일이었는데.
앤젤라에게 개 물건과 개를 양도하는 순간 눈물이 나서 횡설수설 이게 처음이라서.. 안물안궁하실 변명도 하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꼈다. 개 없는 집에 돌아와서 차에서 들을 유에스비에 음악을 넣으니 이제 정말 준비 끝. 위층 보영아빠가 공항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정시에 오셨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고 다행히 공항은 멀지 않았는데(도착한 날은 왜 그리도 멀게 느껴졌지?) 낮에 보는 시골 공항은 더 쪼끄매!
하지만 보안검색은 시골 레벨이 아니었다. 신발까지 벗고 기계 안에 다리 벌리고 손 들고 서서 전신스캔한 뒤에는 큰 가방 열어서 검사까지 했다. 무심결에 들고 있던 500밀리 물과 호텔에서 쓰려고 집어들고 나온 큰 치약 압수. 역시 좋지 않은 기분으로 게이트로 걸어갔는데 역시 시선이 닿는 곳에 모든 게이트가 보이는 아담함이 시골다웠다.
짐은 사실 시간도 여유 있어서 부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미국 국내선은 수하물 체크인시키면 대개 돈 받음. 후후... 것도 25불이나 하는 자비리스한 가격. 식겁해서 들고 탄다고 껴안고 갔는데(그래서 치약 뺏기고...) 아까 티켓팅해준 유나이티드 직원이 게이트에 나타나더니 내 트렁크에 표딱지를 부착했다.
'유료'에 개민감한 아줌마는 당황해서 이거 크다고 뺏아간다는 거임? 하며 놀라는데 그녀가 이것은 따로 비행기에 실을 짐이며, 게이트 입장 후에 놔두면 된다. 경유지 휴스턴에 내리면 또 게이트 앞에서 찾아가라...는데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나와 헤어져서 실리면 그게 체크인한 수하물하고 뭐가 그렇게 다르지?? 음???? 보딩이 시작되자마자 난 나와 같이 짐에 표식을 붙인 여자승객의 뒤로 바짝 붙었다. 내 캐리어 어디다 놔야 하는지 따라하려고. 비행기 문 옆에 이렇게 옹기종기...
이곳에 도착할 때 가장 작은 비행기(양쪽 각 2좌석)는 이미 봤다고 생각했던 나 반성합니다. 1+2 비행기 드디어 경험! 왜 이렇게 "carry on" 짐이 이상하게 처리됐는지도 이해했다. 한 줄짜리 좌석 위엔 아예 선반이 없고, 두 좌석 쪽 선반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오사카 갈 때 탄 피치항공보다도 작다.
화물 수수께끼가 풀리고 나자 이륙 때까지 머릿속엔 온통 배고프다는 생각뿐이었다. 미국 국내선은 얼마 걸리든 상관없이 밥 안 준다길래 점심 먹은 후 세 사람이 먹을 BLT샌드위치와 간식 피넛버터젤리 샌드위치를 싸서 소중히 들고 왔는데, 빨리 떠서 음료 서비스 할 때쯤 먹고 싶은데~!!!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른 후에도 난 온통 곰처럼 큰 승무원 아저씨의 동향이 궁금했다. 경유지 휴스턴까지는 두 시간 반밖에 안 걸리니까 빨리 음료 좀 쥬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는 계속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애타는 마음이 살짝 지쳐 수그러들 때쯤 그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도시락을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샌드위치를 완식할 때쯤 승무원이 우리 쪽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매우 볼드한 해골 반지를 두 개 끼고 팔목에는 가죽과 금속 소재의 팔찌를 레이어드한 데다가 매우 많이 탄 팔에 문신까지 갖춘, 아무리 봐도 라이더셨다. 곰 같은 덩치로 이 작은 비행기 복도에서 일하는 모습이 애처롭더라. 음료와 함께 작은 땅콩봉지라도 받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음료 서비스는 한 번 더 있었다.
휴스턴 상공에서 수영장이 딸린 저택도 보고 트레일러촌도 보니 정말 미국이구나 싶고... 내리고 나서 짐을 받아 부지런히 다음 비행기를 타러 터미널을 이동했다. 극과 극이라 할 만큼 우리 동네 공항과 달랐다;; 카트 타고 이동하는 서비스도 있어; 넓고 사람 많아! 게이트에 도착하니까 이미 우리가 탈 비행기 보딩 시작. 레이오버가 짧은 건 맘에 들었다. 여유를 가지고 비행기 기종을 확인하니 보잉737이라네. 747이랑 비슷하게 크려나? 하며 탔더니 무려 F석까지 있는 3+3 사이즈로 ㅋㅋ 대형은 아니고. 좌석마다 매립형 화면도 달려 있어서 아들이 매우 좋아했으나...
아메리칸의 상술을 얕잡아보지 말라. 유료였다. 저 홈에다가 카드 긋고 보라고... 아들 침울. 뿐만 아니라 이륙 후에 사용 가능한 와이파이도 유료. 알콜 음료도 유료. 웬만한 건 다 유료. 간식으로 나온 프래첼 조각과 음료만 안 유료. 싸가지고 온 피넛버터젤리는 여기서 섭취하고 샌프란시스코까지 4시간 비행했다. 바람이 도우셨는지 예정보다 10분 넘게 일찍 도착했다. 어서어서 예약한 차 찾으러! 렌터카 스테이션까지 에어라인을 타고~
렌터카 사무실과 픽업 주차장이 모여 있는 곳에서 우리가 예약한 thrifty로 갔고, 기운 없고 야위고 어쩐지 크리미널마인드에서 소심한 연쇄살인범 역이 어울릴 것 같은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며 응대를 하셨는데
이곳이 오늘의 하이라이트.
카드결제 오류가 나서 2시간 넘게 기다렸다. 매니저를 따라 이리로저리로 남편이 끌려다니는 동안 아내와 아들은 난민처럼 우두커니 기다렸다. 부처님처럼 남에게 너그러운 남편의 표정도 썩을 만큼. 2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우리 차와 만날 수 있었다. 미안하다고 백불 할인에 마일리지 적은 새 차로 교체;; 아까 우리를 맞이하며 갖은 환영 멘트를 날리던 소심한 아저씨는 이제 우리 눈길을 피하고...
남편은 생애 최초 SUV 경험에 약간 설레는 눈치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싸서 진짜 손 떨며 예약한 차인데... 할인을 받았어도 하루 130불 정도다. ㅅㅂ
자정이 다 돼서야 객실 입장 성공. 시내 호텔이 비싸서 렌트카에 외곽 호텔 조합으로 갔는데 되게 멍청한 판단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 날은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