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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Jun 07. 2016

교섭의 미학

일단은 말해보세요

몇 년 전에 번역했던 '달링은 외국인'이라는 만화가 있다. 실제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자가 그린 자기 이야기인데, 주된 내용은 두 사람의 문화 차이에 대한 것이다. 사실 화자 사오리의 남편 토니는 절대 '평범한 미국인' 범주는 아닌 것 같지만 - 미국인 백인 남성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그렇게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가진다는 게 그닥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음 - 어쨌든 미국에서 나서 자란 그가 하는 행동이 일본인인 사오리에게 놀라움을 줄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교섭'에 대한 부분이었다. 보통 공개된 표지판이나 안내에 대한 내용만을 받아들이고 그 외의 해석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미국인 토니는 '교섭'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제시된 선택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가능한지를 물어보고, 가게의 책임자에게 얼마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번역할 때만 해도 미국에서 내가 생활을 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고, 아주 오랫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놨었는데 최근에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아하, 정말로 그렇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난번에 브런치에 올린 바 있는 '샘즈클럽 계산 오류 사건'이었고 https://brunch.co.kr/@brunch95fe/71 며칠 전에는...


주인공은 아들이 여기서 자기 돈으로 처음 샀던 나이키 운동화(이것도 브런치에 올렸었음)였다. https://brunch.co.kr/@brunch95fe/62 상당히 애지중지하면서 좋아하며 신고 다녔는데, 얼마 전에 메시 소재 부분이 닳아져 두세 군데 구멍이 났다. 사실 이런 재질로 된 운동화에서는 하도 비일비재한 일이라, 물론 석 달도 안 돼서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속상하지만 그냥 그런가... 했는데 신발이 해지고 나자 아이의 '운동화에 대한 애정'은 확 떨어졌다. 그래서 어차피 메이커를 구입했으니(할인점에서 산 거긴 해도) 한국처럼 수선을 맡겨보자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이미 사서 한참 신은 운동화를 뭐 어떻게 해주겠냐는 반응이었는데, 수선은 어디선가 가능할 거라고 설득해서 신발과 아이를 데리고 그 신발을 구입한 rack shoe room에 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점원에게 이 운동화를 산 영수증을 보관하진 않았지만... 하고 수선에 대해 문의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같은 제품으로 가져가든지 같은 가격 제품으로 골라보쇼"


언제 샀는지 얼마에 샀는지 묻지도 않았다. 현재 가격(세일가로 샀던 제품이라 10불 정도 가격이 올라갔음)을 기준으로 교환해준다는 것이었다. 왓?!


애가 신발을 둘러보다가 돈을 좀 보태서 더 비싼 제품을 사도 되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것도 오케이. 그만큼의 크레딧이 있는 거니까 상관없단다. 애는 입이 귀에 걸려서 새 제품을 사고 20달러를 더 냈다.

어제 나는 지난번 개사료를 살 때 영수증에 찍혀 나온 할인쿠폰을 소중하게 품고 펫스마트에 갔다. 같은 회사 제품을 10파운드 이상으로 사면 10불 깎아준다는 쿠폰이었고 또 매장에서 하는 별도의 할인 행사에 대한 쿠폰도 있었다. 당당하게 평소 먹는 사료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살짝 당황. 평소에 먹는 사료 사이즈는 6.6파운드인데, 그 위의 사이즈는 거의 17파운드에 달하는 것이었다; 입이 짧은 개가 너무 오래 뜯은 사료를 먹게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 사이즈 보관도 다 각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들어오면서 살갑게 인사를 나눴던 직원 아저씨를 불러서 내 사료(?) 앞으로 데려와서 쿠폰을 보여주며 얘기해봤다.


조건이 안 맞는 건 알지만 6.6 두 포대를 사면 쿠폰 적용을 해주지 않으련?


그는 1초 정도 망설이고 곧바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굿가이라서 해주겠다고. 기세를 몰아 다른 쿠폰도 보여주며 혹시 이건 적용되느냐, 내가 다른 상품 구매를 더 해야 하느냐도 물었더니 필요 없단다. 필요한 물건은 이게 다냐며, 계산대까지 사료 포대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짧은 거리 동안 그가 일요일인데 기분 좋게 지내고 있냐고 물었다. 난 "You make me a good day."라고 대답했더니 그가 웃으며 자기는 내 덕분에 좋댄다.

15% 할인 행사를 적용한 후에 10불 할인까지 해줘서 19불이나 절약! 고마운 마음에 기부금도 냄.

요는, 이곳에선 일단 되든 안 되든 먼저 이야기는 던져보는 것이 좋다. 운이 따라준다면 권한이 조금 더 많은 점원이 걸리기도 하고(이 세 경우 모두 그랬던 듯, 모두 다른 사람에게 문의하지 않고 직접 포스를 만져서 즉시 대응해줌) 어쨌든 예의만 지킨다면 손해보거나 민망할 일은 전혀 없다.


미국의 좋은 점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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