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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1~11


日本を生きた朝鮮牛の近代史/竹国友康/著



소개


-한국 진주 투우대회인가



2009년 8월 말 나는 한국의 진주에서 투우를 구경했다.


진주시(경상남도)는 한국 남부 지역의 핵심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약 35만 명(2009년 기준, 부산에서 서쪽으로 약 20km, 고속버스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주성이 축조된 오래된 교통의 요충지이다.


임진왜란(1592~93년) 당시 일본군과의 격전지가 되었던 진주성은 현재 진주 최고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도심에서 조금 서쪽으로, 다목적 댐(남강댐)으로 막힌 진양호반에 '진주전통투우경기장'(이하 투우장)이 있다.


이 투우장에서는 4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장마철과 혹서기를 제외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에 투우대회가 열린다.


주관은 진주시, 주최는 진주투우협회가 맡는다.


투우대회에는 청팀과 홍팀으로 나뉘어 약 15개 팀, 30마리의 소가 출전한다.


10월 초에는 6일간 대규모 '전국민속투우대회'가 열린다.


이 전국 대회에는 각지에서 30마리가 넘는 투우가 출전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전국 챔피언을 가린다.



내가 진주 투우장에 도착했을 때 경기는 이미 아홉 번째 조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모래가 두껍게 깔린 원형 투우장에 마주보고 있는 청문과 홍문에서 각각 체격이 좋은 투우가 소의 주인에 이끌려 입장한다.


모두 적갈색 털을 가진 조선소(한국에서는 한우)이다.


이들의 대결표를 보면 청팀의 소는 '몬팀'호, 홍팀의 소는 '파코트룸'호라고 한다.


'몬팀'은 힘이 넘치는 '덩어리', '파코투름'은 상대방을 '파고든다'는 뜻인가 보다.


둘 다 투우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이름인 것 같다. 각 소의 몸통에 그 이름이 크게 적혀 있다.


투우는 몸무게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같은 등급의 소끼리 대결한다.


진주투우협회 규정에 따르면 갑종은 740kg 이상, 을종은 650kg 이상, 병종은 580kg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다.


몽팀과 파코투름은 모두 병종 소였다.



도망치는 몽팀을 쫓는 파코를 소 주인이 제압했다.


이쯤에서 승부가 갈렸다. 승리한 파코는 짧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투우장 밖에 있는 소의 계류장에서 경기를 마친 소 주인 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송아지의 눈을 보면 투우사로서의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투우를 시켜보고 투쟁심이 강한 것을 골라 서서히 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


투우 경기는 보통 몇 분에서 20분 정도에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1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만약 뿔에 찔려서 다치면 사람처럼 치료하고 한동안은 정성껏 휴식을 취하게 해요.”


경기 사이사이에 열리는 노래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투우장 쪽에서 트로트(한국 연가)를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후 을종과 갑종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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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월간지로 발행되던 '조선'에 '진주의 투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1935년 3월호).


당시 투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 보자.


필자는 '경상남도 제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 3월호가 발행될 때까지 경상남도청은 진주에 있었다(이듬해 4월 도청은 부산으로 이전한다.).



진주 투우는 진주의 명물 중 하나로, 진주하면 바로 투우를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며, 남선(南鮮)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명물들처럼 별다른 정설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즉 메이지(明治)년(1883,84) 무렵, 당시 진주의 부호 김선정(金善政)과 성 밖의 호농 양작(梁作)의 양인이 항상 축우(蓄牛)를 사랑하고 특히 우량한 소를 기르며 서로 그 우열을 겨루어 서로 자랑스러워했다,


서로 그 우열을 겨루고, 나아가 그 동민들도 이에 화목하게 되어 부립(部立)의 형세를 이루게 되어 더욱 더 열렬하게 되었다.



과거 투우는 소와 소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소가 대표하는 특정 지역 공동체(진주성 '성내'와 '성외') 간의 싸움(교류)이기도 했고, 일종의 공동체 축제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싸움' 당일에는 근교에서 온 구경꾼이 수만 명에 이르렀고, 승리한 부락민들은 소를 둘러싸고 모여들어 밤새도록 마을을 고무시켰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앞의 기사),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축제이기도 했다.


즉, 소를 이용해 농경과 물자를 운반하던 시대에는 소는 말 그대로 '가축'으로서 말 그대로 '가축'으로서 지역 공동체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와 사람의 관계, 소와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의 결절점 중 하나로 소싸움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과 함께 했다.



'진주 투우'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大正8(1919)년, 예의 만세 소동 이후 민중들의 집회가 보류되어 투우도 자연히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투우도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 후 민심이 회복됨에 따라 축산 개량상 이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할 때, 1923년 총독부에서 축산 장려의 의미로 '투우'를 '투우'로서 활동 사진으로 각지에 실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방민의 열망이 투우에 닿아 투우의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투우는 물론 씨수소 중 우량한 것 중에서 왼쪽의 여러 가지 사항(후술)에 유의하여 선택하지만, 특별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농경용 씨수소 중 우량한 것이 기준이지만, 이러한 '투우'에 선정되는 기준은 농경용 소가 곧 좋은 투우라는 것 외에는 필요한 사항이며, 다시 말해 좋은 농경용 소가 곧 좋은 투우라는 것 외에는 없다.



'예의 만세시위'는 조선 민중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어선 '3ㆍ1 독립운동'을 말한다(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간 지속).


이 전국적인 민중봉기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월간지로 발행되던 '조선'에 '진주의 투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1935년 3월호).


사회문화적 의미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어 그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 본다. 필자는 '경상남도 제일'이라고 되어 있다.


이 3월호가 발행될 때까지 경상남도청은 진주에 있었다(이듬해 4월 도청은 부산으로 이전한다).



'예의 만세시위'는 조선 민중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3ㆍ1 독립운동'을 말한다(1919년 3월 1일부터 몇 달간 지속됨).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어난 이 전국적인 민중봉기를 두려워한 조선총독부는 '민중의 집합'을 경계하여 많은 관중이 모이는 투우대회 개최를 금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는 이 투우를 수단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1933년 진주 투우가 재개되어 '지방민의 열망'에 의한 민속행사의 '부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통행사의 부활에는 민족독립의 '열망'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한다.



투우대회에 출전해 우승할 수 있는 우수한 소를 지역에서 키우는 것은 그 지역 농가에 소에 대한 지식과 개량기술의 향상을 가져다준다.


즉, '좋은 농경우=좋은 투우소'라는 의미에서 투우와 농업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투우에 출전할 수 있는 소로 선발되는 기준이 오른쪽 인용문에 이어 일곱 가지가 열거되어 있다.


용문중의 '좌측의 제반 사항'.


간단히 요약하면, (1) 씨수소로 나이는 5세 이상, 8세 정도까지, 몸길이는 120cm 이상, 몸통 길이에 중점을 두어 몸통 폭이 충분히 넓어야 한다,


(2) 골격이 단단하고 몸이 탄탄해야 한다,


(3) 이마 부분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4) 등부터 갈비뼈까지 관절이 충분히 발달하고 무릎이 튼튼하고 유연하며, (5) 뿔의 길이와 굵기가 일정하고 좌우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한다,


(6) 위협성이 좋고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7) 앞다리에 걸쳐 있는 갈비뼈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좋은 투우소'의 조건이며, 물론 '좋은 농경우'의 조건이기도 했다.



현재 투우대회에 출전하는 소들도 이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아니, 체격은 당시보다 한 뼘 이상 커졌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전환이 진행되면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에 따라 농촌 인구는 감소하고 농업 분야에서도 기계화가 진행되었다.


농경우를 대신해 경운기, 트랙터 등 동력 농기구가 도입되었고, 그 결과 예전의 '좋은 농경우=좋은 투우'라는 등호 관계가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근대화와 함께 지역 공동체(농촌 사회)의 해체 재편이 진행되면서 투우는 지역의 '관광 자원'으로서 행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존속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대부분은 투우를 보러 가더라도 그곳에서 '살아있는 소'를 보는 일은 거의 없으며, 또한 투우 관람에서 지역적 연대를 확인하는 측면은 희박해지고, 오로지 소비되는 오락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각지에서 행해져 온 투우도 마찬가지로 사육되는 소의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 존속이 희박해진 곳도 있다.



현재 '소'라는 단어만 들어도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관광목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흑백의 얼룩덜룩한 젖소 떼, 혹은 마트 식료품 코너에 진열된 소고기 팩, 레스토랑에서 먹는 스테이크나 불고기 등 소고기 요리 .......


하지만 소가 논과 밭을 경작하는 일꾼으로 농부들과 함께 힘차게 일하던 광경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투우대회에서 우승하면 소를 앞세워 지역민과 함께 축하하고 격려하는 등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소와 사람 사이에 공감적 관계가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쉬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소는 한때 그랬고, 지금은 잃어버린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부터 축주의 투우대회에 출전했던 소와 같은 적갈색 털을 가진 조선 소(이른바 '적우'라고 불리는 소)가 바다를 건너 일본의 농촌과 도시에서 일용우로 일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조선의 개국(1876년)부터 일본의 패전까지 약 70년간 누적 약 150만 마리에 달하는 조선 소가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패전 후 그 이입은 중단되었고, 소가 논과 밭에서 일하는 모습도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인 현재, 조선 소를 둘러싼 기억은 이 사회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소에 얽힌 가느다란 기억의 실타래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그것을 어떻게 미래로 이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싶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조선 농업과 조선 소 - 소의 역할 이용을 뒷받침한 관행과 제도'에서는 조선 농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졌던 조선 소의 성격과 그 사육-사역의 실상을 소개하고, 소의 역할 이용의 보급을 뒷받침한 조선 사회의 관행과 제도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또한, 조선소가 농업사회에서 미디어적 기능을 수행했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2장 '조선 소의 이출이 시작되다 - 이출입 제2기 - 소가 건너온 '바닷길'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로 향하는 시기, 조선 소의 이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떻게 운반되었는지 등 조선 소의 이입입국 초기의 실태를 밝힌다.


제3장 '검역제도를 중심으로 한 기구 정비 -이출입 제2기'에서는 조선 소를 이송하는 쪽의 부산, 이송하는 쪽의 시모노세키에 각각 배치된 가축검역소를 동반한 1910년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검역 제도적 기제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과 거기에 작용했던 '정치 역학'에 대해 살펴본다.


제4장 '제국'을 살았던 조선 소 - 일본 식민지를 관통하는 농업정책 아래에서-에서는 이주입국 사업을 추진한 일본 정부, 일본 각지의 농촌에서 조선 소가 실제로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일하며 살았는지, 그 '현장'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제5장 「전시기의 조선 소(이입입출입 제3기-군수와 전시동원)」에서는 전쟁과 조선 소의 이입출입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는지를 개괄한 후, 특히 1930년대에 이어진 전시기에 진행된 소들의 전시 '동원'에 초점을 맞추어 논한다.


제6장 '마쓰마루 시마산-그 사람과 사상'에서는 조선의 '농'과 총독부 '농정' 사이에서 그 축산 행정의 모습과 비판적으로 대면한 마쓰마루 시마산의 사상적 고투를 중심으로 한다,


일본에 돌아온 후의 '조선'과의 관계, 전후에 일관되게 추진한 농촌에서의 사회교육 활동 등, 마쓰마루의 업적과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제7장 '조선 소의 '현재' - 한일 농축산업을 둘러싸고'에서는 일선계 소의 현황에 대해 살펴본다.


일본에 도입된 조선 소는 어떻게 개량되었으며, 전후 조선 소의 도입이 중단된 후 일본에서 그 후손들은 어떻게 '생명'을 이어나갔는가.


한편, 한국전쟁의 전란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한우의 사육두수가 급감했지만, 이후 한우는 부활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이 두 가지 '전후'를 둘러싼 과제에 주목하고, 거기에 은유되어 있는 미래로 가는 실마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맺음말 - 생명의 윤리를 향하여'에서는 일본에 이식된 한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 생각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그 '여행'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의 서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미리 밝혀둔다.


(1) 현재 한국에서는 토종 소를 '한우'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한우'와 '조선우'는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류의 소이다. 일본에서는 조선 토종 소를 와규(和牛)나 다른 외래종과 구별하여 '조선소(朝鮮牛)'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소가 있던 1950년경까지, 그 시기 민족계 신문 『동아일보』의 기사에서도 '조선소'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기관 중 하나였던 농림부 등의 정책에 의해 이후 '조선소'는 점차 '한우'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재래종 소를 현재도 '조선소'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특히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육용 소로 개량된 '한우'를 다루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조선 토종 소를 '조선 소'라고 부르기로 한다.


(2) 인용한 일본어 자료에서 민족적 편견이나 식민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표현이 보이는 경우에도 그대로 둔 부분이 있다.


(3) 본문에서 문헌자료를 인용할 경우, 출처 표기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하고, 그 자세한 내용은 말미에 있는 '인용 및 참고 문헌'에 표시했다.


이 책에서 다룬 전후의 일본어 문헌은 가능한 한 원문을 존중하되, 읽기 쉽도록 구한자・구가나를 신한자・신가나로 표기하고, 주 등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일부 한자를 히라가나로 표기하는 등 표기를 바꾼 부분은 「」으로, 중략 부분은 「......」으로 표기했다.


또한 필자가 주를 붙인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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