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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page40~41

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page40~41

'미디어'로서의 한우

지금까지 소의 예탁 관행과 소 시장에서의 거래의 실제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관행과 제도와의 연관성을 포함하여 조선 사회에서 '소'가 어떤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의 '서문'에서 소개한 진주의 투우를 다시 한 번 다루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진주 투우에 관한 자료 중 “당시 진주에 있던 성내의 부호 김선지와 성외의 호농 이작지 두 사람이 항상 소를 사랑했다,

특히 우량한 소를 사육하여 양자를 하나의 자랑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다(4쪽).

'두 사람이 항상 소를 사랑하고 특히 우량한 소를 사육하여 양측을 하나의 자랑으로 삼았다'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다수의 소를 소유한 수탁자이자 '부호'인 동시에 김 선지 역시 대지주를 경영하는 대지주였다,

거기서 '우량 소(투우)를 선발하는 것이야말로 그 중에서 소를 활발하게 빌려주고 빌리는 예탁 관행을 통해 지역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진주 투우의 유래에 대해 소시장과 연관 지어 설명한 자료도 있다.

산시타 마사미치(山下正道)의 「진주읍지(晋州邑誌)」1936년.

이에 따르면 진주 시내를 흐르는 남강변에 '예로부터' 큰 소시장이 있었는데, 매달 삼팔일에 장이 섰다고 한다.

그곳에서 많은 소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고, 그것이 투우로 발전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소가 뿔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소시장은 이 '옛사람'의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 투우가 애초에 소시장과 불가분의 관계로 기능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주목된다.

소시장은 지역 경제 활동의 핵심이자 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소를 사고파는 '교환의 장'이었으며, 일반 시장이 열리는 날에 바로 옆에서 열리기도 했다.

우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소는 '좋은 농경우 곧 좋은 투우'라는 등식이 있듯이, 동시에 지역민들이 모이는 시장을 통해 '좋은 투우'로도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형식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투우가 소의 예탁 관행이나 소시장과의 관계에서도 기능했음을 인정한다면, 조선의 전통사회(농업사회)에서 '소'는 농업의 생산기반으로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음은 물론, 사회에 널리 유통되는 화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사회경제 활동을 연결하고 기능하게 하는 중요한 '매체(미디어)'이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투우가 지역 공동체의 축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소가 '민족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선소의 미디어로서의 기능에 힘입은 바가 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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