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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 이야기 모단대 명물 불고기 금지

모단대(牡丹臺) 명물 불고기 금지
  
(평양) 평양 모단대 송림속을 노리처 삼는 주객에게는 매우 섭섭한 일이나 모란대 송림의 명물인 불고기는 옥외에서 굽지 목하기로 되엇다한다.
   
모란대는 풍치가 조흔곳이라 부민의 유람지요. 또한 유원지인데이 불고기 굽는 연기로 말미암아 청청한 솔나무가 시들시들 마를뿐 아니라 고기굽는 내음새는 유람객 혹은 삼보하는 이에게 불쾌를 주어 말성이 만헛든바 대동서에서는 부당국과 협의하야 풍치림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불고기 옥외 영업은 일절 금지하기로 되엇다 한다. - 동아일보 1935.5.5.
   
1935년 5월 평양 대동강변 모란봉 의 모란대에서 하도 향락객들이 하도 불고기를 구워 먹어 야외에서 불고기 금지령을 평양경찰서에서 실시 한다는 동아 일보 기사다. 
1935년 조선에는 1,679,470두의 조선우가 사육되고 있었으며 이해에 도축된 소가 250,446두였다고 하니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조선사람들이 특히 경성부, 평양부등 도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쇠고기를 먹었는지 상상해 보자.
참고로 2014년 6월 남한의 한우 사육두수는 2,879천두 였으며 2013년 1년간 도축한 한우의 총 두수는 961,853두 였다. 사육두수는 171% 증가했지만 도축두수는 38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는 1930년대의 조선우(그당시에는 한우라는 말이 없었다.) 역우 즉 일소였기 때문에 지금의 육우, 고깃소가 된 한우 보다 수명이 더 길었다고 보면 된다.
하여간 1950년대 6.25 사변이후 남한내의 소가 50만두 조금 넘었던 걸 생각하면 1930년대 조선은 아니 경성과 평양은 분명 육식의 도시였고 놀라운 건 1930년대 주로 먹었던 고기는 쇠고기였다는 것이고 고기의 요리 방식이 불고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기사에서 불고기라고 하는 것이 꼭 지금의 불고기 요리처럼 양념한 고기인지 지금의 생등심 구이처럼 그냥 생고기를 먹는 방자구이였는지는 확실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 조선우 일소여서 고기가 질기고 나이가 든 소였기 때문에 양념으로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불고기 요리가 유행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문 기사 한줄로 1930년대 조선의 쇠고기 식문화를 전부 다 추정하고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 기사의 불고기가 한우인지 돼지고기인지 이 시대의 불고기는 지금은 불고기와 어떻게 다른지, 1930년대 조선우 특히 평양우의 맛이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 수많은 궁금함이 생긴다.
이 궁금함을 찾아 가 보고 싶다. 

                              


참고문헌 : 평양시 기림리금수산에 있는 봉우리. 모란봉의 높이는 96m이다. 절벽을 이루고 있는 모란봉 아래 대동강 물 위에는 유명한 능라도(綾羅島)라는 하중도(河中島)가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원래 금수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최승대(最勝臺)의 생김새가 마치 피어나는 모란꽃 같다 하여 함박뫼, 모란봉이라 하던 것이 점차 산 전체의 이름으로 되었다. 예로부터 천하제일강산으로 이름이 높아 ‘평양팔경’, ‘평양형승’의 거의 절반이 모란봉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시기 이래의 성문, 누정 등 고적들이 있다. 모란봉 중턱에 있는 을밀대(乙密臺)는 북한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허정(四虛亭)이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을밀대와 대조되는 언덕으로 모란대(牡丹臺)가 있으며, 이 언덕 위에는 최승대(最勝臺)라고 하는 봉화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모란봉 [牡丹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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