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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불고기의 진화 100년


과거의 불고기의 진화 100년*


The Evolution of Bulgogi over the Past 100 Years*


이규진, 조미숙


* 이 글은 이규진의 박사학위 논문 '근대이후 백년안'의 개정판입니다.
韓國 肉食文化 文化 變化"(지난 100년간 한국의 육식 문화
지난 100년 동안의 한국 식문화)를 주제로 2010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연했습니다.
이규진은 가천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메일: aroma711@naver.com.
조미숙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입니다. E-mail: misocho@ewha.ac.kr




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지난 100여 년 동안 불고기의 변천사와 발전 과정을 고찰하는 데 있다.
불고기는 한국 전통의 구이 요리를 계승하고 있는 음식이지만,
동시에 시대적 경제·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조리법과 의미가 달라진 독자적인 음식 문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고기는 단순한 하나의 요리를 넘어서,
한국 음식문화가 지닌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념 구이 요리의 기원은 **고구려 시대(기원전 37년~서기 668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고기는 각기 다른 역사적 시기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직화구이와 국물조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법의 변화를 겪어 왔다.


첫 번째 전환기로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를 들 수 있으며,
이 시기에는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숯불 쇠고기 구이가 등장하고,
불고기의 상업화와 함께 직화 중심 조리 방식이 정착되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발전기에는
육수에 고기를 삶는 형태의 국물 불고기가 등장하였고,
이는 대중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한때 불고기의 소비와 인기가 감소하는 쇠퇴기를 거쳤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조리법을 통해 재조명되며
불고기가 다시 인기를 회복하는 부활기로 접어들게 된다.


주요어: 숯불 불고기, 국물 불고기, 너비아니, 구이 고기, 한국 음식문화\




서론


불고기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더 나아가 불고기는 단순한 요리를 넘어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오랜 한국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불고기가 김치, 비빔밥과 함께 한국 우주인 식단에 포함되기도 하였으며,
해외로도 널리 퍼져 일본의 야키니쿠(yakiniku) 기원의 음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고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얇게 썰어 양념한 고기를 굽는 방식의 요리라는 점이다.
한국의 양념 쇠고기 구이 전통은 **고구려 시대(기원전 37년~서기 66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 시기에는 ‘맥적(貊炙)’이라 불리는 양념된 쇠고기를 꼬치에 꿰어 굽는 요리 형태로 존재하였다.


이후 맥적은 **고기를 세 번 구운 후 찬물에 담그는 ‘설야멱(雪夜覓)’**이라는 형태로 진화하였으며,
이 조리법은 고려(918–1392)와 조선(1392–1910)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너비아니’**라는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조리법이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변천 과정은 다양한 문헌(Lee 1985, Kang 1987 등)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너비아니는 불고기로 발전하게 된다 (Lee 1985, 180).


‘너비아니’는 쇠고기를 얇게 저며 칼집을 낸 뒤,
충분히 양념하여 구워내는 조리법이 특징이다.
사용되는 양념은 간장을 기본으로 하여, 소금, 후추, 파, 참기름, 설탕, 마늘, 배즙 등을 혼합한 것이 일반적이며,
이러한 양념 조합은 너비아니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Lee 2010, 38).


반면 ‘불고기’는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너비아니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구이 고기를 아우른다.
불고기의 조리 방식은 직화구이와 국물 조리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혼합되어 발전하였다.
특히, **너비아니에서 발전한 ‘석쇠 불고기(직화 불고기)’**는
이후 **‘육수 불고기(국물 불고기)’**로 이어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두 방식 모두를 불고기라는 명칭으로 통칭하고 있다.



「불고기, 비빔밥 우주인 식단에 오른다」, 한국일보, 2010년 2월 2일.

영문 인용 형식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습니다:

“Bulgogi, Bibimbap Ujuin Sikdan-e Oreunda” (Bulgogi and Bibimbap Listed as Astronaut’s Menu), Hankook Ilbo, February 2, 2010.


이 글은 한국 음식 불고기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불고기의 형태적 변천, 대중화, 쇠퇴, 그리고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연구의 주요 초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다양한 조리 방식의 발전
불고기를 둘러싼 소비문화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 연구는 지난 100년을 아래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불고기라는 용어가 최초로 인쇄매체에 등장한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 ‘불고기의 출현기’


육수 불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 ‘불고기의 발전기’


1990년대 이후 불고기의 대중적 인기가 감소했다가 다시 부활한 시기 – ‘불고기의 쇠퇴와 부활기’



이 연구에서는 불고기의 조리 방식에 따라 아래와 같이 불고기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구이 불고기: 육수가 없이 불판, 프라이팬, 불고기 전용 팬 등에서 구워 조리한 불고기


육수 불고기: 불고기 전용 팬, 프라이팬, 냄비 등을 이용해 쇠고기 육수와 버섯 등의 채소를 넣고 끓이는 방식의 불고기




불고기는 조리 방식에 따라 분류할 수 있으며, 이는 국물이 없는 구이형 불고기와 국물과 함께 끓이는 탕형 불고기로 나뉜다. 조리 방식에 따라 각각은 ‘구이 불고기(grilled bulgogi)’ 또는 ‘끓인 불고기(boiled bulgogi)’, 다시 말해 ‘국물 없는 불고기’ 혹은 **‘국물 있는 불고기’**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일반적인 식당 운영 관행을 고려하여, 두 유형을 각각 **‘구이 불고기(grilled bulgogi)’**와 **‘육수 불고기(beef broth bulgogi)’**로 통칭하기로 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문헌 분석과 구술 인터뷰를 병행하였다.
현대의 요리책, 신문, 잡지, 연감, 통계청 자료, 회고록,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사전 등의 1차 자료를 중심으로
불고기에 관한 역사적 문헌들을 검토하고 분석하였다.


식문화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전반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며,
특히 외식문화의 발전 과정에 대한 자료는 더욱 희소하다.
이에 따라 구술 인터뷰는 중요한 보완적 자료로 기능하였다.
음식 관련 종사자들—예를 들어 전통 한식당의 운영자 및 관리자 등—이 전하는 기억과 이야기들을 통해
불고기의 역사적 흐름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인터뷰는 2009년 8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대상자는 한국 음식문화 전문가 3명, 그리고 한일관, 우래옥, 옥돌집, 진고개
불고기와 관련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한식당 관계자들로 구성되었다.


자료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간의 상호 검증, 그리고 공식 문헌 자료와의 비교 분석도 함께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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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Grilled Bulgogi


출처: 광양시 공식 홈페이지
(http://www.gwangyang.go.kr/tour_culture/list/view.jsp?gyt_id=50&gyt_mcate=41&gyt_tcate=1)


이 사진은 광양불고기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석쇠에 올려 구운 이 방식은 ‘석쇠 불고기’ 또는 ‘숯불 불고기’로 불리며,
전통적으로 얇게 썬 소고기를 간장 기반 양념에 재운 후,
참숯 위 석쇠에 올려 직접 굽는 방식을 따른다.


곁들여진 통마늘은 지방 함량이 적은 얇은 고기와 함께 구워 먹을 때 풍미를 더해주며,
불고기의 담백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특성을 한층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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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Beef Broth Bulgogi


출처: 필자가 한일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


사진 속 음식은 **전통적인 국물 불고기(육수 불고기)**의 형태를 보여준다.
얇게 저민 쇠고기를 쇠고기 육수와 함께 끓이는 방식으로 조리되며,
양파, 파, 당면, 버섯 등 다양한 채소가 함께 곁들여진 것이 특징이다.


이 조리 방식은 일반적인 직화구이 불고기와 달리, 국물과 함께 끓여 먹는 탕류 형태로,
1960년대 이후 가정식 및 외식 산업에서 대중화된 형태로 알려져 있다.


육수 불고기는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밥과 함께 국물까지 즐길 수 있는 일품요리로 구성되며,
특히 도시 외식 문화와 대중식당 중심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본 연구에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미디어가온(www.mediagaon.or.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포털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의 과거 신문자료, 국립중앙도서관(www.nl.go.kr)의 웹사이트 등이 포함된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세력에 의해 발행된 《국민신보》와 천도교가 발행한 《만세보》 등의 신문기사도 참고하였다. 잡지로는 천도교 계열의 개벽사에서 발간한 《별건곤(別乾坤)》, 《개벽(開闢)》, 김동환 시인이 발간한 《삼천리》, 흥사단이 발간한 《동광(東光)》, 한국사 출판사에서 발행한 여성지 《여원(女苑)》,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 《모던 일본》, 《월간식당》 등의 한국 잡지도 참고 문헌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대부분의 자료는 일제강점기 식문화 연구에 활용되었으며, 보다 정밀한 한국 육류 식문화 연구를 위해 문학 작품, 영화, 노래 등의 문화자료도 분석에 포함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해당 음식점들이 현재 사용하는 명칭인 '한일관'과 '우래옥'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불고기의 등장기 (1920년대~1960년대)


불고기의 시작


불고기라는 음식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고기’라는 단어는 1920년대부터 문헌 자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1920년대를 불고기의 시작기로 설정하였으며, 본 절에서는 이 시기 문헌 속에 등장한 불고기라는 용어의 사용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사된 문헌 중, ‘불고기’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현진건이 집필한 단편소설 「타락자」(1922년 4월 1일, 『개벽』에 발표)이다. 이 소설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을 배경으로, ‘나’와 ‘김승지’라는 두 인물이 기생집에서 삼각관계 속 갈등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은 해당 장면의 일부이다.


“내가 들어가야 당신도 들어가겠소?” 나는 미소로 칼날 같은 도전을 날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 그의 얼굴은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불고기 덩어리 같았다. 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불고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명월관이 불고기를 실제 메뉴로 제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이는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구체적인 요리로서의 불고기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둘째, “숯불 위에서 익는 불고기 덩어리”라는 표현을 볼 때, 이는 얇게 썬 양념 쇠고기 구이인 너비아니와는 구별되는 ‘덩어리 고기를 직화로 굽는’ 형태의 고기요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때의 ‘불고기’는 단순히 구운 고기의 일반 명사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주목할 점은 ‘불고기’라는 단어가 1922년 문학 작품에 명확히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불고기’는 서울 초대 시장 김형민의 회고록에도 등장한다. 김 시장은 1926년,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이미 이민을 간 숙모를 만나게 된다. 그는 회고록에서 “일요일이면 숙모가 아들들을 위해 직접 음식을 해주곤 했다. 그중 자주 만든 음식이 불고기와 육수였다”고 회상한다(김형민, 1987, 65쪽). 여기에서 말하는 불고기는 단순한 구운 고기가 아니라,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한국식 불고기를 의미한다. 또한, 숙모가 하와이 이민 전에 한국에서 이미 불고기를 접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불고기가 전라북도 지역(김 시장의 본적지)에서도 존재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생: 남성을 상대로 노래와 춤 등의 여러 가지 예능 활동을 통해 접대를 하던 여성 예능인들을 의미한다.

김형민: 서울 초대 시장으로, 1907년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다. 1928년 9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6월에 졸업하였다.

불고기라는 명칭이 등장한 회고록이 1987년에 작성되었음을 감안할 때, 당시 하와이에서 실제로 먹었던 음식은 현재 우리가 불고기로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요리였지만,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하와이에서 접한 음식이 훗날 회고록에서 ‘불고기’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수 있으나, 그 요리는 오늘날의 불고기와 사실상 동일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1927년에 발간된 일본 문헌 『고적과 풍속(古蹟と風俗)』에서도 “밥에 국을 부어 내는 한국 식당에서 콩나물, 김치와 함께 불고기가 나온다”고 언급되어 있다(김성윤 2006, 162 재인용). 이 책에서는 해당 불고기가 너비아니 형태인지, 혹은 일반적인 구이 고기인지는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불고기가 한국 식당에서 상업적으로 판매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35년 5월 5일 동아일보에는 「모란대 명물 불고기 금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평양에 위치한 유명한 유원지인 모란대에서는 “불고기를 굽는 연기가 소나무로 퍼져 나가 나무가 말라 죽는다”는 이유로, “모란대 송림의 명물인 불고기를 야외에서 굽는 행위가 금지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기사로부터 식민지 시기 평양의 불고기는 육수가 없는 직화구이 형태였으며, 많은 연기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쇠고기 국물 불고기와는 다른, 구이 불고기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자료로는 이기영이 집필하여 『삼천리』 잡지에 1936년 6월 1일자로 연재한 소설 「십년후」가 있다. 해당 소설에서는 “오랜만에 조용히 모였으니 막걸리 한 잔 하며 속마음도 털어놓자. 경상도에서 불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나니 술 생각도 난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는 불고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요리인지 더 설명되지는 않지만, 불고기가 1930년대 당시 경상도 지역에 존재했고, 술안주로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에 발간된 일본 잡지 『모던 일본(モダン日本)』의 한국판에서도 불고기가 등장한다. “신조선(新朝鮮)에 대한 좌담회”라는 기획 아래, 일본 소설가 하마모토 히로시의 사회로 한국 작가 마해성과 한국 사정에 밝은 일본 참가자들 간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이 대담 중 구이 요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도고: “평양 불고기는 정말 맛있어요.”
하마모토: “모란대에는 맛있는 식당이 두 군데 있어요. 예전에는 기생과 함께 밤에 가서 불고기를 먹었지요.”


이 자료는 1939년 당시 불고기가 맛있는 음식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주며, 앞서 언급한 1935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확인되듯, 불고기와 갈비는 평양 모란대에서 상업적으로 판매된 대중적인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고기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대중가요에도 등장한다. 1938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박향림의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 오빠는 성깔쟁이야, 흥 / 몰라 몰라 몰라 / 내 반찬 다 먹고 / 불고기랑 떡볶이는 혼자 다 먹고 / 나는 콩나물만 주고.”


여기서 불고기는 너비아니와 유사한 구이 요리로, 반찬으로 소비되는 음식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불고기가 대중가요의 가사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1930년대 당시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고기라는 용어는 의미의 차이는 있었지만, 1930년대 중반 당시 서울, 평양,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던 일본(Modan Nihon)』은 1930년 10월에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에서 창간한 월간지이다. 이 잡지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1939년 11월과 1940년 8월, 조선에서 두 차례에 걸쳐 『조선판』 특별호를 발행하였다. 『조선판』은 조선의 지식인으로 알려진 마해송이 발행을 맡았다(모던일본사 2007, 513–514).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일본어인 '야키니쿠(焼肉)'라는 단어도 불고기와 함께 사용되었다. 『매일신보』 1941년 7월 30일 자에 실린 「평양 명물 불고기 인상 진정이 주목을 끌어」라는 기사에서는 “평양 명물인 야키니쿠의 가격 인상을 요청하는 진정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불고기와 야키니쿠라는 용어가 혼용되었거나 병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학가 이효석은 1939년 6월 『여성』지에 게재된 「육영식보(肉營食補)」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평양 사람들이 즐기는 주요 음식 중 하나는 야키니쿠이며, 이 음식은 평양 사람들의 어떤 인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듯하다. 조리법은 매우 단순하며 맛 또한 담백하다.” 여기서 ‘조리법이 매우 단순하다’는 묘사는, 평양 사람들이 고기를 얇게 저미거나 양념하지 않고 생고기를 그대로 구워 먹었음을 시사한다. 조풍연 또한 “평양식 불고기는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를 구운 후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시기의 다양한 문헌에서 등장하는 불고기는 ‘덩어리 고기’,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불고기’, ‘양념하지 않은 평양식 불고기’ 등 다양한 형태를 가리키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국물이 없는 구이 형태였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인다.


구이불고기 전문 식당의 형성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 사회였던 한국에서 소는 농사에 필수적인 노동력이자 자산이었기 때문에 소를 도축해 고기를 소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성,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는 쇠고기 소비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평양신문』 1933년 9월 2일 자의 「육우 사육되는 평양」 기사는, “평양 쇠고기”가 고급육으로 여겨졌던 지역에서 고기용 소가 사육되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다(이기숙, 2012, 423쪽). 이처럼 대도시에서는 육류 소비가 증가하면서 불고기 전문 식당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39년 한일관의 개점을 시작으로, 1946년 우래옥, 1948년 옥돌집 등이 잇따라 문을 열면서 불고기 전문 식당이 확산되었다. 한일관은 “궁중음식 너비아니를 불고기로 상업화했다”는 평가를 미식가들로부터 받았다(한영우, 2001, 339쪽). 창립자인 신우경의 손녀이자 현재의 한일관 대표인 김은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한일관의 역사는 1939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궁중음식 너비아니를 대중적인 음식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우리 식당의 역사와 전통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우리 식당이 궁중의 너비아니를 민간에 전파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불고기가 문헌이나 요리책에 실리기 위해서는 성공한 식당이 존재해야 했고, 한일관이 그 역할을 했다고 본다. …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한일관의 불고기를 따라올 수 있는 식당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비교 대상이 없었다. 나는 불고기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데에 한일관이 크게 기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957년, 한일관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규모였던 3층 건물을 종로구 청진동 도심 한가운데에 세웠다. 『매일경제신문』 1969년 3월 3일 자에 게재된 고액 납세자 명단을 통해 한일관의 사업적 성공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음식 업종에서 고액 납세자로 선정된 세 명은 “한일관 신유경 1,024만 3,350원, 사모정 김정운 992만 1,960원, (상호 미기재) 김정구 904만 900원”으로, 각각 창업주이자 최대 주주였다.


우래옥은 평양에서 명월관을 운영하던 장원일이 남한에 내려와 194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개업 이후 46년 동안 대표 메뉴는 줄곧 “불고기와 냉면”이었다. 개업 당시 평양 출신인 두 명의 조리사, 즉 불고기를 담당한 주상과 냉면을 담당한 유성도가 주방을 맡았다. 우래옥의 불고기와 냉면은 모두 평양식으로 제공되었다. 1963년부터 우래옥에서 일하고 있는 김지억 상무는 식당 불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주상 선생은 불고기를 만들 때 처음부터 끝까지 칼로만 손질하는 분이었습니다. 불고기는 국물이 없었고요… 그냥 자연 그대로… 고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양념을 숙성시키지 않았습니다. 다른 식당들은 다 숙성시켰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고기가 조금 질기다고 말하는데, 양념이 고기에 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바로 그게 우리 불고기의 특별함입니다. 희귀한 고기를 사서 양념에 재우지 않고 고유의 고기 맛을 살리는 거죠. 마늘, 설탕, 참기름, 간장만 넣고요, 그 외엔 아무것도 안 넣습니다. 손으로 몇 번 꾹꾹 눌러서 국물 없이 마른 상태로 내는 거예요.”


불고기 전문점 중 또 하나로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옥돌집이 있다. 이 식당은 서울 출신 신옥돌이 1948년에 개업하였고, 그 후에는 2대 신원준이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김영덕과 왕영희가 3대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광양시청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광양불고기'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불 위에 구운 마로적이 천하일미(天下一味)"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90년 1월 30일 자에 실린 광양불고기 상업화 관련 기사에서는 ‘광양읍 칠성리에 위치한 대중식당’을 “3대째 운영 중인 광양불고기의 원조”로 소개하였다. 해당 식당 대중은 현재도 같은 장소에서 운영되고 있다.


전화 인터뷰에서 김미리 대표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희 시어머니(이순래 대표)의 시어머니가 1950년대 중반에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제일 처음 시작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어 “광양불고기의 특징은 양념된 소고기를 숯불에 즉석에서 구워내는 방식입니다. 간장, 설탕, 참기름, 후추로 양념하고, 파나 마늘은 넣지 않지만, 마늘은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제공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울주군청에서 제공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 '언양/봉계식 불고기'가 본격적으로 상업화되었다고 한다.




불고기의 발전 (1960년대–1990년대)
육수 불고기의 등장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 사이, 불고기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네오비아니에서 유래되어 구워서 제공되던 불고기가 여전히 주류였지만, 이 시기에 육수를 곁들인 새로운 형태의 불고기가 등장하였다. 이 육수 불고기의 등장은 불고기의 대중화를 가속화시켰고, 불고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정확히 언제 육수 불고기가 등장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음 세 가지 증거를 통해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첫 번째 증거는 불고기 대중화에 기여한 한일관에서 구이 불고기와 육수 불고기를 함께 판매했다는 사실이다. 한일관의 김은숙 대표와 언니 김이숙 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일관의 경우 처음에는 구이 불고기로 시작했지만, 육수 불고기가 도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두 가지를 모두 메뉴에 포함시켰습니다. 구이 불고기는 6인 이상 전통 한정식 코스에 포함되었고, 일반 손님이 ‘불고기 주세요’라고 하면 기본적으로는 육수 불고기가 나갔습니다. 구이 불고기를 원하시는 손님은 따로 요청하시면 그에 맞춰 구워드렸고요. 두 메뉴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공존했습니다. 구이 불고기는 1997년 리뉴얼 전까지 전통 한정식 구성으로 운영되었지만, 이후에는 메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두 번째 증거는 4.19 혁명 이후 제작되어 1961년 5월 4일 개봉한 영화 『삼등과장』이다. 영화 후반, 갈등이 해소된 후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불고기를 먹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식탁 위에는 육수 불고기가 올려져 있고, 가족들이 숟가락으로 불고기를 먹는 모습이 나온다.


세 번째 증거는 1963년 충무로에 개업한 ‘진고개’ 식당에서 처음부터 육수 불고기를 판매했다는 점이다. 현재 대표이자 창업자 정상철의 아들인 정관희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에는 숯불을 사용했고, 그 위에 황동으로 된 불룩한 불판을 올려 육수 불고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주물로 된 불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주물 불판은 정성철 창업자가 고안하여 특허를 취득한 것으로, 불룩한 돔 형태의 가운데에 국물을 떠먹기 좋도록 오목한 홈이 두 개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세 가지 증거—한일관에서 두 형태의 불고기가 함께 제공되었다는 점, 1961년 영화에 육수 불고기가 등장했다는 점, 1963년 진고개에서 처음부터 육수 불고기를 판매했다는 점—을 종합하면, 육수 불고기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 이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구이 불고기와 육수 불고기는 공존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구이 불고기의 인기가 점차 줄어들면서 ‘불고기’라는 단어는 육수 불고기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게 되었다.




구이 불고기가 네오비아니에서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다시 육수 불고기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육수 불고기의 출현을 다룬 문헌 자료는 매우 희귀하며, 기존의 문헌적 공백은 역사적인 불고기 전문점의 경영자나 2세대 운영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보완될 수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해 있지 않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3세대 운영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사항은 다소 누락되었을 수 있으나, 본 연구는 육수 불고기의 등장을 가능케 한 몇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우선, 전통 한식인 ‘전골’(煎骨)이 육수 불고기의 기원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전골은 얇게 저민 양념 고기를 해산물, 버섯, 채소 등과 함께 육수에 넣어 끓이는 음식이다(Kang 1987, 127). 한국의 전통적인 고기 조리법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적’(炙)으로 꼬챙이에 고기를 끼워 숯불에 직접 굽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번’(燔)으로 꼬챙이를 사용하지 않고 쇠판이나 돌 위에서 직접 굽는 방식이다. 철의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적에 사용되던 꼬챙이는 점차 석쇠로 대체되었고, 번 방식에서 사용되는 철판인 ‘번철’(燔鐵)이 보편화되고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번철은 ‘전철’(煎鐵)이라고도 불렸다(S. Kim 1997, 346).


‘전철’이라는 단어는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했던 왕실 행사 내용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시기 전철은 ‘전립투’(氈笠鬪)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군모 모양으로 된 철판으로, 모든 면을 이용해 고기를 굽고, 가운데 움푹한 부분에는 고기에서 나오는 육즙이 모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후 그 움푹한 곳에 채소를 넣어 함께 끓여 먹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철’은 ‘전골’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전골’이라는 단어는 조선 말기 요리책인 『시의전서』에 최초로 등장한다. 전철이라는 용어는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전골은 양반가에서 사용되었다.


숯불 위에 올려 조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철은 양념한 쇠고기를 조리하는 데도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철판 위에서 양념 고기를 구워 함께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 풍습을 ‘난로회’(暖爐會)라고 불렀다. 전철의 역사는 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는 숯불 화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군모 형태의 전골 팬이 대신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과거와 달리 고기를 채소 대신 중앙에 올리고, 육즙은 고기를 구웠던 자리에 모이도록 하며, 채소는 고기와 함께 익히는 방식으로 조리된다(S. Kim 2006, 20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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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1961년에 개봉한 영화 삼등과장의 한 장면으로, 육수 불고기가 식탁 한가운데 놓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이 둘러앉아 불고기를 숟가락으로 떠먹는 이 장면은, **육수 불고기(broth bulgogi)**가 당대 일상 식문화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각적 자료입니다.


이 장면은 연구자들이 육수 불고기의 등장을 추정하는 데 핵심적인 2차 사료로 활용되며, 특히 1960년대 초중반에 전통 구이 불고기에서 육수 불고기로의 전환이 시작되었음을 뒷받침해 줍니다.




경도잡지(京都雜誌)의 설명에 따르면, “전립(군모) 모양의 냄비인 과(鍋)는 가운데에 소고기를 굽고 가장자리에 채소를 끓이는 데 사용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불고기를 철판 위에 굽는 ‘번(鐇)’ 방식과 유사하다. 반면, 홍석모가 조선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 등장하는 난로회(暖爐會)는 숯불에 불고기를 굽는 ‘적(炙)’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철망을 이용한 직화구이를 의미한다(S. Kim 1997, 348).


이처럼 불고기의 두 가지 조리 방식은 조선 전통의 육류 구이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용된 조리 도구에 따라 구이 불고기는 직화구이 ‘적’에서, 육수 불고기는 철판 구이 ‘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중 육수 불고기는 철판 구이에 육수를 더한 형태로, 소고기 전골이 그 전신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골은 주요 재료에 따라 이름이 붙으며, 소고기와 버섯이 주재료인 경우 ‘소고기 전골’로 불린다.


또한, 불고기 전골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이 전환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만희 감독의 1968년 영화 『휴일』에는 ‘불고기 전골’이라는 간판이 거리에서 포착되며, 영화 속 음식 장면은 없지만 해당 간판을 통해 육수가 포함된 불고기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아일보 1952년 3월 2일자 기사에서도 “불고기 전골의 맛있는 냄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불고기 전골이라는 이름이 시간이 지나며 줄여져 ‘불고기’라는 단어로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


둘째, 육수 불고기의 등장 배경으로는 소고기 공급 부족 또한 주요 요인이다. 구이 불고기는 오직 소고기만으로 조리되었기에 고기 품질이 매우 중요했고, 등심과 안심 같은 최고급 부위가 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심각한 소고기 부족 상황을 겪었다. 1946년 해방 직후 남한의 소 사육 두수는 “낙농우 포함 55만 7천 마리”에 불과했으며(조선일보, 1947년 1월 18일), 같은 해 12월에는 “600g의 소고기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보도가 있었고(조선일보, 1947년 12월 30일), “평범한 시민은 평생 소고기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소고기는 고급 식재료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소 사육 두수가 39만 2천 마리로 급감했다(중앙일보, 1975년 7월 29일). 이런 상황에서 고품질 고기 없이도 조리할 수 있는, 채소 등 보완 식재료를 활용한 소고기 요리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셋째, 핵가족화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외식문화가 등장하면서, 육수 불고기는 밥과 함께 먹기 적합한 실용적인 메뉴로 자리잡았다. 불고기 변화에 대한 한일관의 김은숙, 김이숙 대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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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1968년 영화 《휴일》에 등장하는 간판 장면으로, 간판에는 "왕대포 불고기전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는 불고기와 전골이 결합된 메뉴가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졌고 상업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불고기 전골’이라는 용어가 일반 대중 속에 자리잡아 있었으며, 이 용어가 시간이 지나며 ‘불고기’라는 단어로 단축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육수 있는 불고기의 정체성이 그 기원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불고기라는 음식이 구이에서 전골 형태로 확장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시각적으로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불고기가 한일관의 메뉴에서 제외된 시기는, 가족 잔칫 문화가 변화하던 시기와 겹친다. 과거에는 환갑잔치나 결혼 피로연 등 가족 잔치를 열 때, 300명이 넘는 하객이 모이는 일이 흔했다. 이럴 때 불고기는 한국식 전통 정식 메뉴의 하나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이러한 가족 문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상다리가 휘는 정식을 주문하기보다는, 소수의 가족이 모여 불고기 전골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기존의 불고기 구이는 정식 한 상차림의 여러 반찬 중 하나였지만, 가족 구조가 핵가족 중심으로 바뀌면서, 불고기 전골은 온 가족이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주 요리로서 더 실용적인 메뉴로 자리 잡았다.


또한 1958년에 개봉한 영화 《돈》에는 '불고기 백반'이라는 메뉴를 판매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으로부터 우리는 불고기와 밥이 함께 제공되는 한 끼 식사 형태가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불고기의 대중화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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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58년 영화 《돈》에 등장한 한 식당 간판으로, ‘불고기 백반(불고기와 밥이 함께 나오는 한 끼 식사)’이라는 문구가 확인됩니다. 이는 불고기가 전통적인 잔칫상 반찬의 위치에서 벗어나,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주요 단품 식사 메뉴로 전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단서입니다.


즉, 불고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 ‘백반’이라는 이름으로 밥과 함께 제공되며 대중 외식문화의 핵심 메뉴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불고기는 외식 메뉴로서 가장 인기를 누린 음식 중 하나였다. 1985년에 실시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외식할 때 가장 선호하는 음식은 여름에는 냉면(48%), 겨울에는 불고기(14%)”라고 응답했다. 또한 1984년 농수산개발공사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불고기가 가장 인기 있는 음식 1위에 선정되었다.


불고기가 가정에서 얼마나 자주 소비되었는지는 1962년 11월 여성지 『여원』에 실린 “11월의 식단”이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당 기사는 한 달 동안의 식단 90가지를 제안하며, 저녁 메뉴로 불고기를 두 번 포함시켰다. 기사의 저자 문수재는 식단 계획 시 “영양의 균형”과 “중산층 가정에 적절한 경제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는 불고기가 1960년대 초 중산층 가정에서도 일상적으로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음식이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1961년 『여원』의 또 다른 기사에서는 불고기 샌드위치를 흔한 아침식사로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특정 계층에서는 불고기가 광범위하게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고기판의 기원은 앞서 살펴본 전철(煎鐵)의 역사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한 과정을 명확히 보여주는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공식적으로 추적 가능한 기록은 특허청에 등록된 불고기판 관련 자료이다. 1962년 2월 22일 박영찬이라는 인물이 최초로 불고기판에 대한 특허를 등록했다. 이 불고기판은 철사로 엮은 석쇠 형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돔 형태의 불고기판 구조였다.


최초의 불고기판은 단순한 돔 형태에 그치지 않고, 열기와 공기의 유입을 조절할 수 있도록 회전식 뚜껑 구조를 갖춘 정교한 기술을 지녔다. 이로 인해 이 불고기판은 원형 모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전에 존재하던 단순한 형태에서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1963년 4월 9일자 『조선일보』는 “한국 불고기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태국으로 불고기판 1,000개가 수출되어 70%의 이익을 남겼다”는 기사를 통해, 불고기와 그 조리 도구가 해외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불고기판에서 끓여 먹는 육수 불고기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히트 상품이 되었고, 한국 식문화가 국제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단서다.


이 시기 ‘불고기’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첫째, ‘불고기’는 ‘너비아니’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1958년 방신영이 펴낸 『고등요리실습』에서는 “표준어로는 너비아니 또는 구이로 부르며, 흔히 불고기라고도 하지만 이는 속된 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불고기는 얇게 썬 쇠고기 양념구이로서, 너비아니와 같은 음식이었다.


둘째, 불고기는 “불에 구운 고기”라는 일반적 의미로도 쓰였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1961년 12월 1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미국식 불고기 바비큐」라는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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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는 1962년에 제출된 불고기판 특허 도면입니다.


상단에는 원형의 불고기판이 보이며, 중앙이 볼록하고 가장자리는 움푹 파여 있어 고기를 구우면서 자연스럽게 고기즙이 흘러내리고, 주변에서 야채나 국물이 조리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당시 전통적인 전철(煎鐵, 철판)과 정골(鼎-) 조리방식을 현대식 조리기구로 계승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불과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회전식 뚜껑 또는 조절 장치가 포함된 점에서, 단순한 철판이 아닌 정교한 열 조절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설계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불고기판(중앙 돔형 구조와 주변 국물 홈이 있는 형태)의 시초이자, 산업화된 불고기 문화의 기술적 기점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불고기의 역사는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고기를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불고기를 조리하는 도구와 방식, 양념과 양념을 만드는 노하우는 그 종류와 형태가 실로 다양할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불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야채, 빵, 옥수수를 곁들여 반찬으로 먹습니다. 미국식 불고기는 만드는 재미가 있고, 한국식 불고기는 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위 문장의 일부에서 불고기는 명확하게 ‘불에 구운 고기’를 뜻합니다. 하지만 “미국식 바비큐 불고기는 만드는 재미가 있고, 한국식 불고기는 먹는 재미가 있다”는 구절에서는 ‘한국식 불고기’가 한국 전통 음식으로서의 불고기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불고기’라는 단어는 ‘불에 구운 고기’와 ‘한국 전통 음식 불고기’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불고기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면서, ‘돼지불고기’(동아일보, 1961년 9월 13일), ‘참새불고기’(동아일보, 1960년 2월 2일), ‘여우불고기’(신동아, 1968년 3월) 등 다양한 단어 조합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불고기의 의미는 육류뿐 아니라 해산물과 채소 등 ‘불에 구운 모든 음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잡지 기사에서 나타나는 ‘전갱이불고기’(여원, 1968년 11월)와 ‘오징어불고기’(여원, 1962년 11월) 같은 요리 이름이 그러한 예입니다.


심지어 채소를 불고기로 지칭한 예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가지불고기’는 “가지를 돼지고기와 함께 와인이나 설탕에 재운 뒤, 불고기 양념 간장에 구워낸 요리”로 설명됩니다.


네 번째로는, 단순히 소금만 뿌려 구운 고기 역시 불고기라 불렸습니다. 작곡가 김대현은 자신의 고향인 함흥의 ‘소금불고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산에서 구운 소금불고기는 최고다. 주먹만 한 돌을 불에 달군 다음, 그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소금을 뿌려서 굽는다. 양념한 불고기처럼 부드럽진 않지만, 그 투박한 맛이 묘하게 입맛을 당긴다. 밥반찬이나 술안주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이처럼 불고기는 단순히 너비아니의 다른 이름에 그치지 않고, ‘불에 구운 고기’에서 ‘불에 구운 해산물 및 채소’, ‘양념한 쇠고기 구이’에서 ‘소금간 구이’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 범위가 매우 넓게 확장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고기는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구이 요리로 자리매김해왔으나,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인 1990년대 초부터 그 인기가 점차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양념하지 않은 등심과 양념 없는 갈비 등의 메뉴는 점점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변화는 1992년의 한 신문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원래 한국 전통 음식 중에서도 정성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고급 요리로 불리는 양념갈비와 불고기는, 외국인들로부터도 그 맛과 품질을 인정받으며 한국 음식 문화를 대표해왔다. 하지만 일부 음식점에서 저급한 고기를 양념으로 감추려 한다는 불신으로 인해, 양념 음식의 위상은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1994년 10월호 『월간식당』에서도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소비자의 미각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양념을 줄이고 식재료 고유의 맛을 즐기려는 경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형 한식당의 주요 메뉴는 불고기와 양념갈비에서 양념하지 않은 생등심과 생갈비로 바뀌고 있다.”


불고기의 인기가 줄어든 현상은 불고기용 부위의 수요 변화와 가격 하락에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특히 갈비와 등심 등 구이용 고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불고기용 부위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2004년 5월의 소고기 판매 동향에 따르면, 불고기용 부위의 일일 평균 판매량은 전년도 같은 시기에 비해 20% 이상 감소했다. 또한, 2003년에는 100g당 4,000원이었던 불고기용 고기 가격이 2004년에는 약 2,000원으로 절반가량 하락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갈비와 등심 부위가 소 한 마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위의 가격이 폭등하고, 반대로 불고기용 부위는 냉동 창고에 재고로 쌓이게 되는 수급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2004년에는 한국육류소비촉진협의회가 “불고기를 먹자”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갈비구이와 등심구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한국의 대표적인 육류 요리인 불고기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부위별 수급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너비아니에서 발전한 구이 불고기의 계보는 단절되었고, 불고기는 점점 ‘불에 구운 고기’가 아닌, ‘삶는 요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불고기의 쇠퇴는 세 가지 주요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소비자 기호의 변화이다. 이 시기부터 소비자들의 선호는 불고기에서 양념하지 않은 생등심과 생갈비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전통적으로 양념 구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한국의 식문화도 점차 생고기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둘째는 불고기의 품질 저하이다.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구이 불고기는 등심과 안심 같은 고급 부위를 사용해 별다른 부재료 없이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방식은 최고의 고기 품질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이 불고기가 국물 불고기로 바뀌면서 육수와 각종 채소 등 다양한 부재료가 추가되었고, 이로 인해 고기의 품질은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등심 대신 가격이 절반 수준인 우둔살 같은 저렴한 부위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품질보다는 양이 중요해진 것이다.


1985년의 기사에서도 국물 불고기에 대체 부위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매일경제신문』은 국물 불고기에 사용되는 쇠고기 부위로 주로 목심, 앞다리살, 불고기용 고기, 스테이크용 고기 등을 언급하였다. 이는 과거 너비아니나 구이 불고기에 사용되었던 등심·안심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국물 불고기는 상대적으로 고급 부위보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대중화될 수 있었지만, 이후 소비자들의 음식 품질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면서 불고기의 인기도와 소비는 줄어들게 되었다.


셋째는 생고기의 조리 편의성이다. 양념 구이는 고기를 다듬고 일정 시간 재운 뒤 조리하는 등 여러 단계를 필요로 했다. 반면, 집에서도 바로 구워 먹을 수 있고 외식 시에도 즉석에서 조리 가능한 생고기의 편의성은 빠르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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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는 1985년 7월 19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소고기 등급 분할도”로, 각 부위별 고기의 이름과 용도, 그리고 비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심(4.3%), **안심(2.5%)**과 같은 고급 부위는 소 전체 중 차지하는 비율이 낮고,


앞다리(7.7%), 우둔(11.0%), 설도(10.0%) 등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양이 많은 부위로, 국물 불고기 등에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도표는 불고기의 부위 변화—고급 부위에서 대체 부위로—가 실제 유통 구조와 소비자 접근성에 따라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각자료이기도 합니다.




불고기의 부활


비록 국물 불고기가 국민적인 인기 메뉴로 자리를 잡은 시기에도, 구이 불고기는 미미하지만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래옥은 1946년 개업 이후로 평양식 국물 없는 불고기를 계속 제공해왔다. 또한 광양 불고기와 언양/봉계 불고기처럼 전통적인 너비아니 방식 그대로 석쇠에 구워 조리하는 불고기들도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광양 불고기는 식당마다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간장 양념에 재운 소고기를 숯불에 바로 구워내는 방식으로 조리된다. 이는 전통적인 너비아니와 유사한 조리 방식이다.


언양/봉계 불고기는 숯불구이 생고기와 양념 불고기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다. 숯불구이는 소금으로만 간을 하여 굽고, 불고기는 다양한 양념에 재운 고기를 직접 숯불에 구워 조리한다. 언양 불고기의 조리법에 대해 언양불고기협동조합의 최해준 지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양 불고기는 소금구이 생고기와 양념 불고기로 나뉘며, 양념 불고기는 얇게 썬 고기를 다져서 만든 고기떡 형태로 보시면 됩니다. 과거에는 간장 양념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한우의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간장 냄새를 없애는 쪽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대신 소금과 육수를 활용한 새로운 양념법이 쓰이며, 과일은 넣지 않습니다. 고기의 풍미를 유지하기 위해 3~4시간 정도 양념에 재운 뒤 숯불에 직접 구워냅니다.”


흥미로운 점은 1990년대 초부터 불고기 소비가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불고기를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활용해 다양한 방향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불고기 버거’가 등장하고,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가 다시 역수입되었으며, 불고기의 기원이 되는 너비아니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불고기 변형 사례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판매되는 불고기 버거이다. 국내 패스트푸드 브랜드 롯데리아에서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약 1억 개 이상의 불고기 버거가 판매되었다. 이어 1997년 10월부터는 맥도날드에서도 불고기 버거를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치킨 전문 패스트푸드 브랜드 파파이스(Popeye’s) 역시 불고기 버거를 출시하였다.


불고기는 해외에서도 ‘한국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에서는 불고기 전문점 운영자들이 모여 ‘전일본야키니쿠협회’를 설립하였다. 재일한국인 유시기가 1963년에 도쿄 인근에 개점한 ‘안라쿠테이’는 2000년 기준으로 265개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며 일본 최대의 야키니쿠 체인으로 성장하였다. 야키니쿠는 현재 스시, 햄버거와 함께 ‘일본 외식 3대 인기 메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불고기가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인식되었고, 문화체육부는 불고기를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10대 복합 이미지 중 하나로 공식 지정하였다.




불고기의 전환과 발전 과정을 시각적으로 요약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도식(도표) 형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식은 불고기의 기원부터 현대적 재해석까지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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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의 전개 및 발전 과정 도해 요약


1. 고대의 구이



Maekjeok (Goguryeo)


Seoryamyeok (Goguryeo–Joseon)


Neobiani (post-Joseon dynasty)


: 고구려 시대의 맥적에서 조선 후기 궁중요리 너비아니로 발전



2. 근대 이후



Bulgogi (after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 일제강점기 이후 '불고기'라는 이름 사용 시작



⚙️ 두 가지 경로로 발전


A. 직화구이형 (Grilled bulgogi 계열)



(Grilled) bulgogi


Gwangyang / Eonyang / Bonggye bulgogi


Dissemination overseas: Japan Yakiniku


: 광양/언양식 불고기와 일본 야키니쿠로 확산



B. 전골형 (Beef broth bulgogi 계열)



The influence of (beef) jeongol


(Beef broth) bulgogi (after the Korean War)


: 전통 정골 문화의 영향 → 국물 불고기 형성



결론


한국의 구이 요리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적(炙)'으로, 꼬치에 꿰어 숯불 위에서 직접 굽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번(燔)'으로, 철판이나 돌 위에 직접 불을 가해 고기를 굽는 방식이다. 이 중 적은 고구려 시대의 **맥적(貊炙)**에서 기원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서람적으로 불리다가 너비아니로 정착하였다. 너비아니의 뚜렷한 특징은 얇게 썬 쇠고기를 양념에 재워 즉석에서 굽거나 숙성 후 굽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현대 불고기는 너비아니를 계승한 형태로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역동적인 변화와 전환을 겪어왔다. 숯불 위에서 직접 굽는 구이형 불고기는 적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너비아니의 직접적인 후손이다. 반면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국물 불고기는 철판 위에서 고기를 익히는 번 방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불고기는 한국 전통 구이 방식인 적과 번을 모두 포괄하는 대표적인 구이 요리이다.


본 연구는 지난 100년간 불고기의 변화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먼저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현대 불고기의 탄생기에서는, 너비아니에서 유래한 직화 불고기가 본격 상업화되었고, ‘불고기’라는 단어는 1920년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여 193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양념구이'에서 '너비아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 사이에는 국물 불고기가 등장하였으며,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전국적으로 불고기가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비양념 신선육 선호가 확산되며 불고기의 인기가 다소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고기의 조리법이 다양하게 응용되고, 직화 불고기가 다시 주목받으며 불고기는 다시금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고기는 한국의 대표 음식을 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로 자리매김하였다. 단순한 음식명을 넘어, 장구한 문화 유산이 응축된 상징적인 이름으로서 글로벌 브랜드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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