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풍요의 상징
제5장 풍요의 상징: 동아시아 민속에서 재물과 복(福)의 아이콘이 된 이유
동아시아의 식문화와 민속적 맥락에서 돼지는 단순한 가축의 범주를 넘어 선다. 인류가 가장 먼저 길들인 가축 중 하나인 돼지는 오랜 세월 인간의 주거 공간 안에서 공생하며, 생존을 위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가문의 자산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돼지가 동아시아 민속에서 풍요와 재물의 상징으로 귀결된 배경에는 언어적 함의와 생물학적 특성, 그리고 농경 사회의 생태적 순환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1. 주거와 정착의 기호, '집 가(家)'의 철학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돼지가 차지하는 위상은 '집 가(家)'라는 글자의 형상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글자는 '지붕(宀)' 아래에 '돼지(豕)'가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지붕 아래 돼지가 자리 잡고 있는 상태가 비로소 완전한 '가정'을 의미했음을 시사한다.
정착의 증거: 소나 양과 달리 돼지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도 사육이 가능하며, 인간이 남긴 음식물 부산물을 훌륭히 섭취한다. 따라서 돼지를 기른다는 것은 이동하지 않고 한곳에 머물며 농경 생활을 영위하는 정착 공동체의 성립을 상징했다.
자산의 척도: 고대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돼지가 매우 귀한 동물로 여겨져 무덤에 함께 묻을 만큼 부의 상징으로 통용되었다. 가옥 내부에 돼지 우리를 배치한 건축 구조는 돼지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2. 경이로운 생산성과 경제적 가치
돼지가 복(福)의 아이콘이 된 실질적 동력은 그 압도적인 번식력과 성장 속도에 있다. 이는 가산이 불어나고 가문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농경 사회의 염원과 일치한다.
번식의 미학: 돼지는 한 번에 평균 12마리에서 14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출산이 가능하다. 이러한 다산(多産)의 특성은 풍요로운 자손 번창과 재물의 증식을 상징하는 강력한 기호가 되었다.
성장의 효율: 돼지는 잡식성으로 사료 효율이 뛰어나며, 다른 가축에 비해 체중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적은 투자로 큰 고기와 지방을 얻을 수 있다는 경제적 실용성은 돼지를 '걸어 다니는 저금통'과 같은 존재로 각인시켰다.
3. 농경의 생태적 파트너와 비료의 원천
돼지는 단순히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을 넘어, 농사를 가능케 하는 생태적 순환의 핵심 고리였다. 특히 한국의 전통 농가에서 돼지 사육의 주된 목적은 고기 생산만큼이나 비료(퇴비) 확보에 있었다.
퇴비의 공급원: 돼지의 분변은 농경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최상의 비료였다. 과거 조선 농민들은 덩치가 크고 사료를 많이 먹는 서양 품종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분변을 많이 배출하는 재래종을 선호할 만큼 돼지의 비료 생산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폐기물의 자원화: 돼지는 인간이 먹을 수 없는 곡물 부산물과 남은 음식물을 먹어 치워 고기와 지방으로 변환시킨다. 이처럼 버려지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돼지의 능력은 농가 경제의 자급자족을 완성하는 풍요의 근간이었다.
4. 제의와 민속 신앙 속의 영적 매개자
돼지의 풍요로운 이미지는 관념의 세계로 확장되어 십이지신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신과 인간을 잇는 제물로 격상되었다.
십이지신의 마지막 수호자: 전설에 따르면 돼지는 느긋함과 집중력 덕분에 십이지신의 대열에 합류했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은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부를 누릴 운명을 타고난다고 믿어졌다.
제례의 정수: 돼지는 국가적 제례부터 민간의 고사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는 핵심 제물이었다. 특히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고 입에 지폐를 물리는 행위는 돼지가 하늘의 복을 인간 세상으로 배달하는 전령이라는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아시아 민속에서 돼지가 재물과 복의 상징이 된 이유는 그것이 삶의 터전인 '집'을 완성하고, 경이로운 생산성으로 가계를 지탱하며, 농사의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돼지는 관념적인 복이 아니라 실제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를 일구어준 실천적 풍요의 근거였다. 이처럼 돼지는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곳에서 생존과 번영을 동시에 담보해온, 동아시아 농경 문명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