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이전의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우리나라 올댓 돼지
-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2017년 우리나라 연 평균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24.5kg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돼지고기 소비량은 평균 7% 정도 증가 하였다. 돼지 머리, 다리, 내장 등 부산물을 포함하면 소비량은 더 많다. 다른 육류 소비량에 비해 월등히 많은 량이다. 소비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인간은 장수를 위해서도 돼지고기를 즐기는 듯하다. 돼지고기는 장수하는 식품이다. 이러한 장수 식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양돈산업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한다. 앞으로 역사와 생활 속 돼지와 돼지고기 이야기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I. 고려 이전의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고려 이전의 돼지와 돼지고기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광활한 영토에서 우리 민족이 유목과 농경문화가 혼합된 다문화 국가들로서의 긴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특히 식문화에서 있어 지역적 특징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수도권 인구집중으로 지역적 특징이 약해질 법한데도 뚜렷한 지역적인 식문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과거 돼지고기의 선호와 식문화는 특히 한수 이남과 이북 간의 차이가 컸다.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수 이북의 국가들과 백제, 신라 등 한수 이남 국가들의 돼지 사육과 돼지고기 (섭취)문화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을 추정되는 바, 이런 관점에서 고려 이전의 돼지와 돼지고기에 대한 고찰을 우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지리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시대에는 북위 50° 부근까지 국토가 확장된 때도 있었지만, 신라통일 이후엔 북위 33~43°의 북반구 중위도의 온대에 위치한 반도국이다.
고조선, 부여 시기는 만주 벌판 및 요하 유역까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문화가 쉽게 전래되어 발달했다. 북쪽으로는 육로로 대륙과 연결되고, 동, 서, 남쪽으로는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바다 삼면의 해안선 길이는 약 8,700km에 달하여 해양문화가 일찍이 발달하면서 남방문화의 유입도 가능했다. 내륙은 산악지대, 평야, 분지, 계곡, 강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런 자연과 지리학적 환경에서 한국인은 다양한 생활습성을 형성했으며, 다양한 음식의 조리 및 저장 방법을 터득하고 꾸준히 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던 우리 민족의 가축 사육과 고기 탐식생활은 긴 역사와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역사적으로 변천을 거듭해 왔다. 종교적 이유와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에서 감추어지고 정리되지 않은 많은 부분이 있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에 의해서 잘못 해석된 부분도 많이 잔존해 있다. 역사적으로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나 몰이해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돼지관련 산업의 방향을 오류 없이 모색해보고자 하는 데는 이유 없을 것이다.
돼지관련 산업을 공급체인으로 이해하고, 돼지고기 공급체인은 돼지사육과 도축, 가공단계를 거쳐 정육과 부산물 소비로 구성된다. 물론 산업차원에서 돼지사육에 필요한 생산자재 공급, 돼지고기 공급과 소비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관여하고 활동한다. 여기서는 시대별 돼지 사육, 그리고 돼지고기 소비에 대해 구분하여 살펴본다.
1. 원시시대의 돼지
가축 사육은 농사와 함께 사람이 농경사회 생활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식량생산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진전이며, 오랜 기간 사냥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에 기초하여 시작된 새로운 생산부문이다.
사람들이 짐승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사냥으로 획득하던 고기나 털, 가죽을 보다 쉽게 얻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가축화를 위해 사람이 먼저 기르기 시작한 짐승은 개와 돼지였다.
돼지는 원시농업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흔히 기른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원시시대의 돼지는 뱀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주는 역할이 컸다. 돼지의 가죽과 지방은 뱀의 독으로부터 돼지를 지켜 주었다. 돼지는 잡식성이라 뱀도 잘 먹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돼지를 기른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반면에 가축사육을 부업으로 삼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돼지를 기르지 않고 양이나 염소를 비롯한 그 밖의 짐승들을 길렀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였다고 추정된다. 그것은 집돼지 뼈가 신석기시대 전기의 유적들에서 발굴된 일이 없고, 신석기시대 중기와 그 이후 시기 유적들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집돼지가 발굴된 유적으로는 서포항 유적 4기층과 범의구석 유적 1문화층, 가촌 유적 1기층 및 2기층을 들 수 있다.
원시시대에 사람에 의해서 가축화된 개나 돼지는 복합적인 용도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개는 사냥에 동반하고 적의 침입을 알려 주었으며, 돼지는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는 다용도의 가축이었다.
돼지가 개와 함께 일찍 가축화된 것은 돼지가 다음과 같은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는 소나 말과는 달리 몸이 중형이므로 산 채로 잡기가 쉽고 우리를 만들기도 쉽다. 그리고 성장발육 속도가 빨라 10∼12달만 기르면 되고, 한 배에서 낳는 새끼 수가 많아 쉽게 증식시킬 수 있다는 점 등 다른 짐승에겐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 우리 선조는 가축을 작은 규모에서 부업적 형태로 길러왔다. 이 시기는 고기에 대한 수요를 야생짐승을 사냥하여 충족시켰다.
2. 고대의 돼지
사냥한 짐승은 곧 소비해야하고, 건조방식으로 소비 기한을 늘릴 수 있다. 가축은 필요에 따라 소비할 수 있으므로 저장된 식품과도 같으며, 또 시일이 지남에 따라 번식으로 그 양이 늘어나는 식품이기도 하였다. 가축은 영어로 ‘livestock’이다. 이 단어는 ‘live’(살다, 살아있는) + ‘stock’(저장, 저장품)이니, 가축은 살아있는 저장품인 셈이다. 이와 같은 특장점으로 인하여 가축사육은 급속하게 보급되어 갔다.
사육된 가축을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기 위한 목적도 가축화의 큰 이유이다.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희생물로 쓸 가축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산채로 희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먹이가 풍부한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는 일찍부터 가축사육이 발전하여 목축업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이 지역에서 가축은 인간의 주요 식량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예를 들면, 넌장강 및 쑹화 강 중하류 일대의 평원에서 생활한 부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축사육은 중요한 식량생산 부문의 하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목축업이 발전하였었다.
서기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는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국(槖離國)에서 왕의 시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여기서 탁리국의 돼지가 살려준 아이가 곧 부여(夫餘)를 건국한 동명(東明)이다.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부여는 돼지와 깊은 인연을 가진 나라이다. 부여는 말, 소, 개, 돼지 등의 이름을 따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저가(豬加)의 관명(官名)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돼지 이름을 딴 이름이 저가(豬加)이다. 부여는 소, 양, 개, 말과 함께 돼지를 키웠고, 가축을 잘 기르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부여 관련 기록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여 지역이 돼지를 키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본래 숲지대나 그늘진 강둑에 사는 동물이고, 나무 열매 또는 과일, 식물 뿌리 등을 먹으며 산다. 부여가 위치한 만주 지역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목재를 생산하는, 드넓은 나무바다(樹海)가 펼쳐진 곳이다. 644년에 편찬된 진나라(晉- 265~419)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의 <숙신씨(肅愼氏)> 기록에는, “이 나라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 기록, “그 나라에는 가축으로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 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는 내용과 거의 같다.
우리 선조들의 목축업은 한 고장에 정착하면서 농업을 기본으로 하고 목축업도 중시한, 반농 반목축 성격을 가진다. 기온이 따뜻하고 농사에 적합한 평야와 언덕, 계곡과 분지가 있는 길림, 장춘 지방의 송화강 중류와 요하 중하류 이남 지역들에서의 가축은 돼지가 주를 이루었다. 이는 유적들에서 발견된 가축의 뼈가 압도적으로 돼지 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유적에서 나온 돼지 뼈에서 돼지 머리의 주둥이가 짧다.
이는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돼지에 대한 종축 작업이 겉모양을 평가하여 실시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둥이가 가늘고 길면 거친 사양관리조건에 적합하며 고기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종축으로 마땅하지 않다. 주둥이가 짧으면 성질이 온순하고 먹성이 좋으며 따라서 고기생산성이 높아서 종자 돼지로 골랐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말경에 우리 선조는 겉모양에 의해 돼지를 고르면서 보다 생산성이 높은 돼지로 개량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돼지 고르기, 이것은 방목 위주로 하는 유목민식 돼지관리가 아니라, 돼지를 우리에 넣어 집 주변에서 관리하는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삼국시대와 발해, 통일신라시대의 돼지
고구려시대 돼지
고구려 시기에는 돼지를 관청에서 길렀고, 개인들도 길렀다. 당시의 봉건국가에서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는데, 거기에 장생이라는 관리를 두었다.
『삼국사기』 13권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3월조에는, "교제(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쳤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령하여 이를 쫓아가게 하였다.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국내(성) 사람의 집에 가두어 두고 기르게 하였다"고 씌어 있다.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인 교시(郊豕)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19년(기원전 1)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長屋澤) 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다리 근육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祭天)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한 것이냐.’ 하며 두 사람을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희생물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었으며, 희생용 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이를 뒤쫓던 관리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이 지역이 수도로 삼기 좋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기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게 된 것이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208년 교시가 달아나자 관리들이 쫓아가다가 주통촌(酒桶村)이란 곳에서 후녀(后女)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게 되었다. 관리들이 후녀에 대해 임금께 이야기하였고, 마침내 임금이 후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 성 밖의 돼지)’라 하였는데, 그가 곧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수도를 새로 정해주고, 동천왕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고구려에서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길만했다.
고구려시대 돼지고기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기음식인 맥적(貊炙)은 멧돼지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중국의 책 '수신기(搜神記)'에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고기구이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불고기 음식이다.맥적은, (멧)돼지를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 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굽는다. 이는 간이 깊게 배어 있고 구워낸 맛이 고소해서 중국에도 전해졌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노루, 소, 개 따위의 고기도 좋아했지만, 돼지고기를 특히 즐겨 먹었다. 중국 책 '수신기'에는,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로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음식이며, 이웃 나라에도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 맥(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맥은 그들로 봐서는 동이족이다. 그리고 적(炙)에 대하여 예기에서 설명하기를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 굽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의례에서 모든 적은 무장이라 하였고, 이미 조미해 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고기 요리는 전통적으로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묻혀 먹는데 비하여, 적은 미리 조미하여 굽기 때문에 일부러 조미료에 묻혀 먹을 필요가 없으니 무장(無醬)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맥적이란 미리 조미하여 직접 구운 맥족의 고기 요리를 가리킨다. 맥적이란 고기에 부추나 마늘을 풍성히 넣고 미리 조미하여 구워 먹는 것이니 미리 조미한다는 점에서 불고기의 원조라 볼 수 있다.
고구려인이 육식을 즐겨했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은 그의 형수였던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인 우씨 왕후의 방문을 받는다. 산상왕은 왕후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하자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 손가락을 싸매준다.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이 660년경에 편찬한 사류부(事類賦)인 한원(翰苑)에는, 고구려인이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패용한다."고 했다. 안악3호 고분의 벽화에는 부엌 옆에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둔 육고(肉庫) 그림이 있는데, 꼬챙이에 걸린 그림에서 사슴과 돼지고기를 볼 수 있다. 안악3호 무덤의 벽화에 푸줏간과 걸려 있는 돼지고기는 개인이 기른 돼지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안시성 안에서 닭과 돼지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상당한 숫자의 돼지를 사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수도의 남쪽 교외에는 봄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고, 북쪽 교외에는 하지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다. 이 관영 돼지목장에서의 돼지사육 규모와 사양관리기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제사에 쓸 용도이었으므로 한두 마리를 기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일정한 목장형태를 띠었을 것이며 사양관리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봉건국가가 운영한 돼지목장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 백제, 발해 시대 돼지
개인들도 돼지를 길렀다는 것은, 앞의 자료에서 위나암에 있는 어떤 집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에서 이 전 부터 돼지를 기르던 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정창원(正倉院- 나라현 도다이사에 위치한 왕실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81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촌락문서 (新羅村落文書)에는 지금의 청주(淸州) 주변 4개 촌락의 인구, 토지, 나무와 함께 가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4개 촌락에 말 61마리, 소 53마리와 그 증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돼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농민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와 말에 비해 돼지 키우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488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이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신라> 조에 ‘재상의 집에는 소, 말, 돼지가 많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도 귀족들의 육식 욕구를 충당시켜줄 돼지를 키웠을 것이다.
백제는 [수서(隋書)] <백제> 조에, ‘백제에 소, 돼지, 닭이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 돼지와 관련된 상황을 깊이 알 수가 없다.
발해에서도 막힐부의 돼지가 유명하였다. 발해는 겨울은 춥고,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나 짧으며, 봄·가을은 메마르고 건조한 지역이다. 영토는, 동쪽으로는 연해주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니 아무래도 겨울이 길었다. 한겨울에는 오전 9시가 되어야 날이 밝고 오후 4시면 어두워졌으며, 기온도 매우 낮아 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갔다. 삼림은 무성하여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이 울창했다.발해인이 즐겨 먹는 음식 중 첫 번째는 돼지고기다.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위를 이겨내려면 지방섭취가 많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돼지
통일신라에서도 관영으로 제사에 쓸 돼지를 길렀다. 711년 신라의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도살(屠殺)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의 도살금지는 가축을 함부로 죽여 육식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불교가 도입된 이후, 함부로 살생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육식 소비가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로 다음과 같은 규범을 제시하였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이는 신라 고유의 정신적 바탕에 불교와 유교 정신이 잘 융합 정리된 것으로, 일반 국민들의 도의 표상이 되었고 화랑의 규범 정신이 되었다. 인도와 일본은 불교 국가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살생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신라의 원광 법사는 불교의 가르침을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고 있다. 신라의 땅에 살고 수초를 먹는 자로서, 불교에 앞서는 것이 조국이라 하면서 살생유택이라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생유택을 설명하였는데, 육제일 즉 매월 8, 14, 15, 23, 29, 30일의 여섯 날과, 춘하일 즉 동물 번식기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다. 꼭 필요할 때만 죽이되 수많이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에겐 육식 엄금이 아니었던 것이다. 식물성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균형있게 섭취함으로써 건강한 신체를 도모하고, 이로서 삼국통일이란 성과를 일궈 낸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