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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모 수출 - 돼지털도 수출했던 이야기

2월 10일 SBS스페셜 돼지의 품격에 돈모 수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돈모 수출 

1960년대의 축산물 수출중에는 생돈이외에 돈모가 상당량 수출되고 있었다. 돈모는 당시의 돼지 도축이 탕박(열탕) 도축 위주로 돈모와 박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돈모의 수집이 가능했다. 돈모의 수집은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해외의 솔제조용 털로 엄청난 물량의 수출이 가능하였던 품목이었으며 정부에서도 외화획득 품목으로 중요시 다루어 왔었다.


돈모는 도축된 돼지의 원모를 수집하여 불순물과 잔털을 제거하고 털의 길이가 같은 것을 정선하여 증기처리(화씨 200도이상의 온도에서 4시간 찜)등 가공하여 수출상품화하였다. 돈모의 용도는 주로 의복솔, 구두솔, 페인트솔 기타 무기등의 브러쉬 제조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한국산 돈모는 모질이 우수하여 브러쉬류 제조에 적합하였다. 특히 제주산 돈모는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돈모는 그 생산기가 12월 ~4월중인 것이 가장 좋은 수출용으로는 주로 2~3인치가 적합하였다. 돈모의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 영국, 호주, 홍콩이며 이밖에 일본, 서독, 네델란드, 벨기에등 유럽지역도 수출 되었다. 1960년대 돈모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년가 100만$에 달하여 당시 수출상품중 10안에 드는 유망수출 상품이었다. 돈모의 생산실적은 약 45만 파운드로 추정하였다. 수집만 잘 되면 상당량 더 수출 할 수 있을 것으로 당시 전망하고 있었다. 

돈모의 생산은 도축장의 부산물로서 도축시 제거하는 원모를 수집하여 혼합된 이물을 제거하고 선모하여 이를 가공처리하여 생산한다. 돼지의 도축은 허가를 받아서 도축장에서 도축하는 이외에 밀도살이 성행하고 있어 정확한 도축두수를 파악할 수 없어서 수집을 못하는 원모가 많았다. 당시 도축두수는 서울, 경기, 경남, 경북, 충북순으로 많았다. 돈모 업자는 약10여개소이며 돈모 가공공장은 서울, 대전, 조치원, 부산, 마산, 대구등 각지에 산재되어 있었다. 원돈모의 수집은 제조업자가 직접 각 지방에 나가서 소량씩 수집하기도 하며 지방의 소재하는 상인이 수집하여 거래하기도 한다. 당시 돈모생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원모수집이었고 밀도축분의 원모를 수집하는 건이 문제였다. 

1962년도에 한국 돈모공업협회에 의해서 알려진 돈모의 수집량은 약 83만근 (498톤)이었으며 하모, 추모, 동모의 수집비율은 각각 15%, 25%,60%였다. 각도별 수집량을 보면 전남이 18만근 ( 108톤)이었으며 경남북, 충남이 각각 10만근 ( 60톤)이었으면 기타 도가 10만근 미만이었다.

돈모의 국내 수요는 총생산량의 1%선이어서 돈모는 수출주력상품이었다.

돈모의 수출은 1959년이후 증가 되어 왔는 바 1960년에 주로 미국, 일본에 453,561Lbs

(205,731kg)을 수출하였으며 1961년에는 미국, 일본외에 영국, 호주, 서독, 홍콩에도 수출되었다. 수출량은 443,935Lbs (201,365kg) 였다. 그러나 수출의 대부분은 대미수출이고 국내생산량의 약 99%를 수출했어 년간 약 170만$정도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돈모만 잘 수집된다면 수출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유망 수출품이었다.

당시 돈모의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 상대는 서독과 중국인데 중국상품은 우리나라의 주수출지역과는 경쟁될 수 없으며 서독상품은 백색돈모로서 매우 우수하였다. 

국내 사로는 당시에 동흥물산, 금상사, 이한산업, 대전돈모, 풍한산업, 남방물산, 금성물산, 덕풍상사 등외에 다시 상사가 있었다. 이들 주요 수출 상가 들고 있는 수출상의 애로점은 돈모의 검역제도의 완화문제였다, 돈모의 검사는 당시 3중으로 되어 있는 바 합동 검사. 검역증 및 수출검사가 있다. 따라서 검사제도를 단일화하여 시설검역으로 하도록 요청했다. 돈모는 제조공정에서 살균되는 것이므로 원가만 높아지는 당시의 검역제도를 시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돈모의 수출은 해외시장시세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수출량은 증산은 국내에서 조직적인 수집망을 통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수집하며 동시에 중간수집업체를 제거함으로써 돈모의 원가를 절감시켜 원가면에서 보다 더 국제시장에 유리하게 진출 할 수 있었다. 년간 170만$ 정도를 수출할 수 있었던 돈모는 당시에는 유망 수출 상품이었다. 1970년도에도 돈모 단일 품목으로140만불의 수출목표를 세워 놓고 수출을 하였은 수익성이 낮아 돈모의 수집과 정선등에서 결손이 생겨 수출이 부진해지자 돈모를 수출하는 상사에게는 우피를 연계(링크)해 수입케 하여 결손을 보전토록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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