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구이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
특집 / 1 전문
소갈비 르네상스를 꿈꾸며
갈비구이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
2010년 3월 농림수산식품부는 외국에서의 유망 한식 메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현지에서 실시한 ‘한식 세계화를 위한 해외 정보 조사’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해외 한식당 진출 시 미국은 갈비구이와 너비아니, 김치해물치즈파전, 비빔밥, 닭갈비가 유망 메뉴로 뽑혔다. 일본은 갈비구이, 불고기, 해물파전 ,떡볶이, 비빔밥이, 중국은 갈비찜과 너비아니, 삼색전, 떡볶이, 삼계탕의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 갈비구이는 국적을 불문하고 어느 나라에서건 인기 있는 메뉴다. 갈비는 불고기와 더불어 1945년 해방을 전후해 우리나라 육류 구이 외식을 주도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주도권을 등심구이와 삼겹살에게 넘겨주었을까? 또한 이미 포화된 지금의 고급 한우 등심 시장에서 다시 한우 갈비구이의 부활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 본다.
1. 갈비구이 시장의 어제
옛 문헌을 보면 갈비라는 표기는 처음 우협(牛脇)에서 ‘가리’로, 그 후 다시 갈비로 변화했다. 조리방식은 갈비에 칼집을 넣고 배즙을 포함한 갖은 양념을 갈비에 바르거나 재는 양념갈비였다. 17~18세기에는 갈비를 굽다가 찬물에 담가 즉시 건져서 다시 굽기를 세 번 반복하였다. 이렇게 구운 후 양념하여 굽던 방법이 18세기 후반 19세기 중엽에는 양념한 갈비를 한 번에 굽는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엽에는 갈비를 기름에 지져서 놓았다가 먹을 때 굽는 방법과 갈비를 기름에 잠깐 튀겨낸 후 양념을 하여 굽는 방법이 추가로 나타났다.
현대의 양념갈비 조리과정은 대체로 갈비를 잘라 칼집을 넣고 양념에 버무려 재워 굽는 방법이다. 갈비구이의 양념은 간장을 기본으로 하여 깨소금, 후추, 파, 참기름, 설탕, 마늘, 배즙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너비아니의 일반적인 양념과 비슷하다.
1920년대 ‘평양우’ 바탕으로 평양서 갈비구이 퍼져
갈비구이의 대중적 상업화의 시작은 1920년대 이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1920년대 서울의 선술집에서 막걸리 안주로 구운 갈비를 팔았다는 것을 ‘별건곤’ 제4호에 실린 권구현의 소설 ‘폐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서울의 갈비구이 집에서는 육개장과 갈비구이 그리고 백숙영계 등 다양한 음식을 함께 팔았던 것 같다.
평양에서 갈비와 평양냉면이 1920년대부터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우’라는 육질이 우수한 한우 품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체구가 위대하고 매우 유순하여 일 시키는데 적합하고 석회암층에서 사육하였기 때문에 맛이 좋다. 호평이 널리 퍼져있는데 현재 사육 두수는 십만 팔천여두이다...(중략) 순천, 맹산, 양덕, 덕천, 성천, 영원 등의 중간산간 지대가 주산지이다’(평양소지 1933, 1934)는 기록이 있다.
또한 ‘평양매일신문’ 1933년 9월 2일자에는 ‘평양우의 비육 사양 개시’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933년에 평양우의 식육 전용 사육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1931년 당시 인구 2천만 명이었던 한반도에 사육되었던 한우의 두수가 무려 1,637,019두였다. 이는 인구 80.7명당 1두로 대단히 많은 한우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우가 농업 노동력인 역용을 위해 사육되기도 했지만 식용 사육과 한우 고기에 대한 소비 확대를 말해주는 통계 자료라 하겠다.
남한 갈비구이의 시작, 수원 <화춘옥>
1945년 해방이후 남한 갈비구이 외식시장의 역사는 경기 수원 <화춘옥>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1945년 고 이귀성 씨가 시작했다. 경기 수원은 당시 우시장으로 유명했고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 농업의 중심지였다. 경제의 수도 역할을 했던 터라 고객 구매력이 대단히 큰 시장이었다.
<화춘옥>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이용해 유명해졌다. <화춘옥>은 처음부터 갈비전문점이 아니라 해장국과 갈비를 함께 팔았다. 사냥을 좋아했던 박 대통령이 군인 시절 이 집에 들러 해장을 하고 올라가곤 했다고 한다. 1979년 <화춘옥>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본 <화춘옥>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후 이목동 노송거리와 동수원거리에 갈비촌이 형성됐다. 1980년대 수원 근처는 대공원, 민속촌, 에버랜드와 같은 관광시설이 몰려있어 관광을 마친 사람들이 수원갈비를 찾으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수원갈비의 특징은 우선 갈비 폭이 10cm~13cm로 크며 간장과 조미료를 쓰지 않고 소금으로 양념을 한다. 소금 양념을 하면 고기의 색이 변색되지 않고 육질과 색깔을 그대로 유지 할 수 있다. 수원갈비의 양념은 소금과 설탕을 1:5로 하고 참기름, 후추, 마늘, 파를 사용한다.
포천 이동갈비와 해운대 갈비
포천 이동갈비는 대중적이고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일대에서 1950~1960년대 사이에 갈비구이 집단 촌락이 형성됐다. 포천 이동갈비의 전성기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무렵 이동면을 중심으로 갈비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시기다.
그러나 이른바 ‘본드 갈비’ 보도 여파와 광우병 사태 등 여러 악재가 겹쳐 이동갈비촌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원조이동 김미자 할머니갈비> 등 소수의 이동갈비 전문점들이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놀라운 것은 이동에서 서서히 갈비의 고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 이동갈비의 특징이 양적인 푸짐함을 추구해 갈비를 반으로 잘라 2~3cm 크기로 짧게 토막을 내고 간장양념에 재우는 형태였다. 그런데 최근 <원조이동 김미자 할머니갈비>에서는 미국산 진갈비를 포작업하여 양념에 잰다.
지역을 기반으로 유명해진 갈비로는 해운대 갈비도 있다. 이는 1964년 영업을 시작한 <해운대 소문낸 암소갈비집>을 시작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운대 갈비는 둥그런 불고기판을 사용해 간장양념에 재운 갈비를 굽고 양념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특징이 있다.
2. 갈비구이 시장의 오늘
강남 가든형 갈빗집의 탄생
1980년대 초반부터 강남개발이 본격화했다. 강북의 전통적 상권 대신 강남 개발 지역의 대형 가든형 갈비집으로 중심이 이동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여러 중소 갈빗집들의 호황기였다.
1981년 11월 강남 신사동에 <삼원가든>(대표 박수남)이 생기고 나서부터 <늘봄> <서라벌> <초성공원> <한강장> <강남장> 등 15개소의 대형 가든형 갈빗집이 들어섰다. 구파발, 일영, 벽제 등 서울 변두리와 교외에서도 대형 가든형 갈비집들이 성업했다. 그러자 개성 있었던 서울의 중소형 한우 갈빗집들은 경쟁력을 잃고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갈비구이의 모양새가 지금처럼 변형된 것은 강남지역의 대형 갈빗집들이 성업하면서 부터다. 갈비를 한쪽으로만 뜨는 ‘외갈비’가 생겼으며, 다이아몬드 칼집을 이때부터 넣기 시작했다. 강북 지역 식당에서는 갈비를 양쪽으로 포 뜨는 ‘양갈비’로 만들어 쟀으며 지금보다 약간 큰 편이었다. 고기의 두께도 좀 더 두껍게 떠서 쟀다.
양념갈비 구이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갈비 쪽으로 점차 고객의 입맛이 변하게 되었다.
LA 갈비의 등장과 중소 갈빗집의 퇴조
1990년대 초 수입 LA갈비가 등장하자 갈비구이를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LA 갈비란 ‘6~8번 부위를 천연근 봉합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근육을 제거하고 지방 정선 작업을 하며 얻어지는 부위’다. ‘측면의’를 뜻하는 영어 단어 ‘래터널’(LATERAL)에서 L과 A를 따 ‘LA 갈비’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소 해체 시 톱을 많이 사용해 가능한 스펙이다. 이런 LA 갈비는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주부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또한 거의 일반 불고기 같은 조리법으로도 요리가 가능해 갈비 소비의 확대를 불러왔다.
1980년대 들어와 한우 등심구이 집과 삼겹살집의 약진과 달리 중소형 한우 갈빗집들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0년대 초반 대형화된 갈비 전문점의 등장으로 중소형 갈빗집들 사라졌다.
둘째, 대형 갈빗집들도 경기 침체와 여타 외식업종의 활성화로 매출이 감소하자 수입육을 사용, 품질이 떨어졌다. 수입 갈비만의 판매로는 운영이 어려워진 고깃집은 한우 등심구이로 주력 메뉴를 바꿨다. 일부 대형 갈빗집에서는 고가 전략으로 나와 일반 서민의 한우 갈비 외식에 장벽이 됐다. 대형 가든형 갈빗집들은 인건비 상승, 각종 관리비 상승, 부가가치세의 세원관리 강화 등으로 관리비용이 급증했다. 이런 요인들이 저가 수입 갈비로의 전환이나 고가 갈비 전략을 압박했다.
셋째, LA 갈비의 등장으로 가정 내에서의 갈비구이가 급격히 증가했다.
넷째, 한우의 품종 개량 사업으로 한우 등심의 품질이 개선됐다. 또한 대일 돈육 수출로 삼겹살의 부분육 유통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구이 기구가 발전했다. 식당 운영자들이 별 기술 없이도 등심 구이집이나 삼겹살 구이집 운영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우 등심과 삼겹살집이 늘면서 서울 등 수도권에 한우 갈비구이 쇠퇴하기 시작됐다.
부위 등 재해석해 합리적 가격 도출한 경상도 갈비, 주목할 만
한우 갈비 쇠퇴기를 서울과 수도권으로 한정한 것은 안동, 영주, 대구 등의 한우 산지에서는 한우 갈비에 대한 인기가 여전했기 때문이다. 예부터 한우시장이 발전한 지역에서는 한우 도축 후 등심은 서울로 판매하고 지역 내에서 갈비를 여러 형태로 소비했다.
경북 안동의 경우, 안동역 앞에 1970년대부터 한우 갈비를 판매하는 전문점이 한 두 집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우 갈비촌을 형성하고 있다. 경북 영주는 지역 한우 식당의 메뉴가 ‘한우 갈빗살’ 딱 한 종류뿐인 식당들이 많다. 서울에서는 고가인 갈빗살을 안동과 영주 등에서는 200g에 2만~2만5000원 선의 가격에 판매한다. 이는 임대료의 저렴함 등 지리적 이점보다 한우 갈비 유통에 대한 이해와 갈비 부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한우 갈비는 제1~5번 갈비를 ‘본갈비’라고 부른다. 갈비 근육이 살코기와 지방이 세 겹으로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부드럽고 쫄깃한 저작감과 고소한 육향이 일품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근육과 뼈 부위여서 근막이 많지 않고 근섬유가 단단하다. 근내지방이 많아 육즙이 풍부하며 육향이 진하다. 마블링이 좋아 생갈비구이에 이용해도 무난하나, 등급이 낮은 것은 통갈비로 썰어 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제6~8번 갈비는 ‘꽃갈비’라 부른다. 육색이 연한 선홍색으로 바탕에 하얀 마블링이 고루 퍼져 있다. 갈비를 감싸고 있는 근막도 그리 두껍지 않고 지나치게 질기지 않아 식감이 부드럽고 쫄깃하다. 따라서 꽃갈비는 등급이 낮아도 양념하지 않고 칼집을 넣어 생갈비 구이에 이용하는 것이 좋다.
‘참갈비’라 부르는 제9~13번 갈비는 얇은 삼각형 모양으로 본갈비에 비해 섬유질과 근막이 많고 거친 편이다. 꽃등심과 양지의 중간 정도 맛이 난다. 살코기가 적고 갈비뼈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생갈비 구이나 찜요리에는 다소 부적합하다. 하지만 장시간 끓이면 근막이나 육단백질이 부드럽게 풀려 나온다. 두툼한 갈비뼈에서 우러나는 골즙이 육단백질 향미와 잘 어울려 육향을 진하게 하고 감칠맛을 더하기 때문에 갈비탕에 이용하는 것이 좋다.
통상 한우 갈비를 이렇게 세분해 서울에서는 흔히 꽃갈비(6~8번 갈비)만을 구이용으로 사용한다. 이와 달리 영남지역에서는 갈비의 1번부터 13번까지 통째로 정선하여 구이용으로 사용함으로써 합리적 가격을 형성한다. 또한 편리성을 위해 손으로 잡고 뜯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구이 문화를 만들어 유행시키고 있는 대구지역은 한우 갈빗살 시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갈빗집들
대구 <국일생갈비>의 암소생갈비는 15일 이상의 숙성이 가져다 준 감칠맛을 글로 쓴다는 건 좀 무리다. 경북 영주의 작은 갈비 집들의 갈빗살 단일 메뉴판을 보면 저런 고집스러움은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맛있는 한우 갈비는 다 지방에서 숨겨 놓고 먹는 것 같다.
고깃집 주인이라면 경북 안동의 마늘 양념 갈비에 우거지 된장과 갈비찜을 만나면 ‘이 메뉴 우리 식당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충남 예산 <고덕갈비>는 고기 중 최고 부위가 갈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전북 군산의 <뽀빠이 갈비>는 갈비 가격이 200g에 1만4000원이다. 이 가격으로 서울에서 장사하면 모두 부자가 될 거다. 정말 지방에는 아직도 당당한 한우 갈비집들이 많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서서갈비>는 한국 외식 산업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강원 춘천의 <봉운장>은 ‘평양우가 이런 맛이었겠구나’ 짐작케 해준다. 외식산업에 ‘맛의 방주’가 있다면 <봉운장>의 다소 거친 씹는 맛의 갈비를 태웠으면 한다. 옛맛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경기 포천 <원조이동 김미자 할머니갈비>의 깊이 있는 장맛으로 재운 갈비의 맛에서 장이 가지는 의미와 장과 고기와의 궁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부산 <해운대 소문난 갈비집>은 개인적으로 40년 전 부자 외삼촌 덕분에 배터지게 달달한 암소갈비에 대한 맛의 추억이 있다. 이런 갈비 구이 식당들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갈비구이 식당이다.
3. 갈비구이 시장의 미래
서울·수도권과는 달리 맛있는 한우 갈비를 합리적 가격에 판매하는 지방의 한우 갈비 식당들이 건재하다. 이들에게서 ‘갈비구이 르네상스 시대’ 재개 요소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이미 한우 등심 시장은 레드오션이 되었다. 마블링 좋은 등심의 선호도가 식어가고 장기 불황의 경제 여건 속에서 한우 갈비구이는 한우 구이 시장의 새로운 탈출구가 될 것이다.
한우 갈비는 등심보다 훨씬 육향이 진하다. 마블링 좋은 1++등심은 지방의 고소한 맛으로 먹는 것이지 감칠맛 나는 단백질 맛으로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보다 구강 구조가 약하고 고기를 오랜 기간 먹지 못했던 일본인이 지방 맛으로 고기를 먹는 건데 그걸 우리는 최상의 한우 맛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은 오래 갈비구이를 선호했을까? 물론 1970년대 이전 일소였던 한우 중 그래도 부드러운 부위가 갈비였기 때문이겠지만 갈비는 고기 중 가장 진한 고기 맛을 가진 부위다. 또한 적당히 씹는 맛을 줘 인간의 고기 본능을 가장 자극해 준다. 또한 갈비는 메뉴 구성의 다양성이 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히 갈비구이가 아니라 갈비 모둠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미래는 질적 소비가 우선되는 시장이다. 양보다 맛있는 고기 모둠으로 메뉴화 할 수 있는 것이 갈비다. 특히 갈빗살은 80g, 120g, 160g 등 작은 메뉴 구성이 가능하다. 또 이미 세절해서 손님 테이블에 제공하기 때문에 손님이 스스로 구워 먹을 수 있는 메뉴다.
그럼 한우 갈비구이집으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전문화다. 갈비 한 메뉴만 판다. 이건 아무리 작은 식당이라도 하루에 적정 규모의 갈비 소비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갈비를 짝으로 구매하여 상품성이 있을 때 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가능한 자체 인력으로 짝갈비 해체 작업을 해야 한다. 짝갈비의 가격과 수율을 감안해 볼 때 자체 인력이 갈비 포작업을 하거나 갈비살 작업을 할 경우 인건비 부담이 되지 않아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 셋째, 단순히 식당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메뉴가 아니라강력한 추가수익 메뉴가 있어야 한다.
80년대 이후 우리 외식산업은 편의성 추구와 인건비 절약 등 단순하고 시스템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 결과 별다른 개성 없이 서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한우 갈비구이 는 각 식당 마다 개성 있는 양념이나 플레이팅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메뉴로 손님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매력 있는 메뉴다.
글 김태경(식육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