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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1950,60년대 양돈업

식육 마케터 김태경 Ph.D

해방이후 1950 ~60년대의 양돈 

해방이후 우리 양돈업의 현황과 양돈에 대한 인식을  잘 말해 주는 책은 1953년 축산기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양돈저서다.
이책에 의하면 고래로 선조들께서 여러가지 가축을 길려 본 결과 돼지의 수입이 좋다는 점 농사를 짓을 때 돼지가 없으면  거름이 모이지 않고 또 현금 수입이 없다는 점 농사를 짓을 때 없으면 안될 소를 많이 잡아 먹지 말고 돼지를 많이 길려서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라는 점 등을 생각하고 돼지 기르는 것을 장래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외국 문화와 물화가 수입되며 또 외국인들도 자주 드나들게 되자 돼지고기의 쓰이는 곳이 늘어나고 돼지도 개량 할 길이 열려 해가 갈수록 점점 발전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버크셔 순종이 들어 와서 재래종과 교잡하여 버크셔 잡종이 요크셔 순종이 들어와서 재래종과 교잡하여 요크셔 잡종이 만들어졌으며 또 중국 호종을 들여다가 버크셔 순종과 교잡하고 그 잡종을 다시 재래종 교잡하여 이대 잡종도 만들어 보는 등 가지가지 종자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누구나 양돈업을 하면 수입이 많고 힘들기 않고 거름을 많이 받는 장점이 있다는 것 알게 되자 농가마다 기르려 하였으며 도시부근에서는 육돈으로 쓰기 위해 전업적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농가에서는 한두마리에 불과하고 도시전업양돈가는 십두에서 삼십두씩 기르기 시작했다. 


6.25 이후 도시부근에서는 군대나 공장소재지부근에서 큰 양조공장 부근에서 생산되는 염가사료를 배경으로 전업적인 양돈업자가 생겨나고 도시속에 작은 공터만 있어도 돼지우리를 짓고 그속에 기름진 큰 돼지를 기르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농촌에서 비료를 얻기 위한 부업적 양돈과는 그 의미가 다르고 점차 사육두수가 늘고 있다.

돼지고기를 가공하는 방법도 날이 갈수록 발달하여 소 도살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나라의 형편에서 더욱 돼지고기가 필요하게 된 것이고 문화수준이 높아갈수록 육식이 점차 늘어가는 점을 보아서 지금 사육하고 있는 돼지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사료가 어느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우리나라 상태로서 또 서양에서 순개량종등도 직접 수입할 수 있는 것 등을 살펴 볼 때 우리나라 양돈업은 전도가 양양하다고 볼 수 있다, 양돈전서 축산기좌 로요환지음 농대교수 이용민 교열 축산기술연구회 1953

양돈저서에서는 해방이후 양돈업을 도시부근의 전업농과 농촌의 농가 부업농으로 나누어져 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6.25 전쟁이후 전업적 양돈 규모가 10~ 30두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버크셔와 재래종의 교잡종, 요크셔와 재래종의 교잡종과 중국종과 버크셔 다시 재래종의 이종교잡종 이건 아마도 평북돈같은 돼지를 말하는 것 같은데 상당히 나름 우수한 돼지를 보유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양돈 사료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평가한 점도 지금의 우리와는 많은 시각차이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도시부근의 양돈과 농촌의 양돈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살펴 보자.

도시부근의 양돈
도시부근에서 하는 양돈업은 대개가 전업적으로 하는데 이 전업적 양돈은 번식양돈과 비육양돈으로 구분할 수 있다. 
번식양돈은 자돈을 판매할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영국같은데는 이런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은 발달하기 않고 있는 형태다.
비육 양돈은 아직은 우리나라 전체 양돈업에서는 그 숫자가 미미하지만 경영을 하는 개인들은 이것으로 자기 생활을 유지하는 형편이며 농가에서 몇 마리 기르고 있는 부업적인 양돈과는 다르다. 
도시부근에 비육 양돈가들이 차차 증가하는 바이며 또 잔반을 사료 이용하여 사회적 측면에서는 적극 장래하여야 한다.
그러나 비육 양돈업이라고 자돈을 다른 곳에서 사들여서는 안된다. 즉 자기집에서 종자라든지 혈통이라든지 내력같은 것이 좋은 조건의 암퇘지를 몇 마리 골라두고 거기서 자돈을 생산하여 자급자족하여야 한다.
또한 지리적 조건이 좋아야지 그 장소가 합리적이지 않으면 아무리 양돈기술이 좋아도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렵다. 
그럼 도시부근 양돈업의 지리적 좋은 조건은 무엇일까?
1) 염가로 사료를 풍부히 얻을 수 있는 곳
현 국내 사정으로 어디를 가든 쌀겨와 보리겨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사료영양가로 보나 분량적으로 보나 비싼편이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서 먹인다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대도시에서 처분하기 곤란한 밥찌거기를 얻어다 먹일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즉 군대, 학교, 공장 같은 소재지에서 밥찌거기나 맥주, 소주, 엿 전분 제조공장에서 나오는 지게미등 이런 것은 모두 다집성사료가 되어서 멀리 운반해서 팔아먹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부근에서 염가로라도 사는 사람만있으면 주게 되니까 이러한 조건만 있다면 돼지집지을 장소만 있다면 덮어 놓고 시작해 볼 것이다. 단지 주의할 것은 일년내 중단되지 않고 언제나 그 사료가 생산되는가를 고려 할 필요가 있다. 
2)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돼지집터를 얻어야 한다.
사료 운반이 곤란하다든가 차왕래가 불편한 지대라면 모든 비용이 이중으로 들어가고 작업상 지장이 많다. 
그 다음은 비육양돈업의 필요한 조건
A. 사료 배합을 합리적으로 하여야한다. 
비육돈 사료와 모돈 사료를 구별해서  급여하여야 한다.
B. 전업 양돈이라도 함부로 마리수를 늘리지 말아야 한다. 
  . 사료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 자가 노동력을 충분히 고려하여 비싼 임금이 나가지 말아야 한다.
  . 자기자본이용의 한도를 넘어서 고리자금을 쓰면 안된다. 
3)철두철미 점진주의로 나가야 한다. 
 기르는 마리수가 적을수록 아무런 사고없이 자라는 것은 돼지밖에 없으며 마리수를 많이 먹일수록 사고가 많은 것도 돼지밖에 없는 것이다.
4) 돼지 기르는 것을 절대로 남에게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애축심이 자기자녀를 기르는 정도까지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경영자 자신이 손수 돼지몸을 닦아 주고 먹이고 하는 일상관리를 담당하여야 한다. 

농촌의 양돈 
농촌양돈은 대개가 부업적으로 전국 농가에서 소규모로 번식돈으로 하는 것과 비육돈으로 하는 것으로 구분해서 모두가 구비(廐肥)를 얻기 위해서 양돈을 하고 있었다. 
구비를 목적으로 하는 양돈에 다가 비육돈을 겸하게 됨으로 자연적으로 부업양돈의 본체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번식양돈도 따르고 있으나 이것은 모(牡)돈이 필요한데 대개 농촌에서는 종모돈을 잘 기르지 않는 편이 많다. 
농촌의 부업양돈을 나누어 보면 
가. 자돈을 비육돈으로 하는 것
나. 암퇘지 한 마리만 두고 번식돈으로 하는 것
다. 수퇘지만 두고 인근 암퇘지에게 종부만 부쳐 주고 종부료만 받는 것 있는데
가,나를 겸하거나 나,다를 겸하는 사람 가, 다를 겸하는 사람, 가,나,다 모두를 겸하는 등 다양한 경영체를 만들고 있다. 

1953년에 출판된 양돈전서를 통해 1950년대초반의 우리 양돈산업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농촌은 비료를 얻기 위한 부업농의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었고 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전업적 양돈업은 도시근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밥찌꺼기 즉 잔반등의 사료를 주로 먹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사료의 자급자족형태로 양돈업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재래종과 서영종의 교잡종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45년 호당 사육두수가 1.34두, 1946년 1.17두,1947년 1.21두, 1948년 1.23두, 1949년1.01두 1950년 1.05두로 호당 사육두수가 1.4두이상이 된 해가 1971년이니 해방이후의 양돈업은 197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고 봐야 한다. 
해방이후 1950,60년대 양돈 현황


한편 농협중앙회 축산물 수급 밀 가격 자료, 축산물 통계총람의 자료들을 살펴 보면 
1945년 남한의 돼지사육두수는 195천두로 앞에서 이야기한 양돈 전서의 통계 자료와는 상당한 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156천두로 사육두수가 극감했는데 불과 오년만은 1955년 126만두로 백만두 이상을 사육하기 시작한다. 이런 두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약간의 편차를 보이면서 유지하고 있다. 호당 사육두수도 1.3두내외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도축두수가 사육두수대비 1950년대는 10%미만이고 1960년대도 50%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한해의 도축두수가 사육두수의 160%이상 되는 것으로 보아 마을 잔치나 추렴등 자가 도축이 성행하여 도축두수 통계가 매우 부정확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1960년대까지도 돼지고기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비되어 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 여성지 여원 (女苑)을 보면 당시 한국에서 돼지를 가장 많이 사육하고 있는 곳은 제주도이며 그 종류는 요크셔와 버크셔였다고 한다. 또 기사에는 돼지고기는 도시에서 음식찌꺼기로 사육된 것 보다 산이나 들에서 풀같은 것을 뜯어먹고 자란 것이 맛이 더 좋고 특히 제주도, 대구, 남원의 것이 맛이 좋다고 되어 있다. 이 기사로 보아 경상도지역과 남원등의 지역별로 돼지맛이 다른 돼지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50,60년대의 요리 연구가들이 여성지나 신문에 돼지고기 요리를 소개할 때 지금과 다른 점은 그냥 돼지고기라는 총칭을 사용하지 부위별로 요리하는 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냄새를 잡기 위한 정종, 마늘, 생강등 각종 향신료를 쓴 요리법이 거의 전부라는 거다.
요즘처럼 돼지고기의 육향을 살리는 요리법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돼지고기는 지금과는 달리 냄새가 엄청 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1963년 여원 유계완 (조리연구가) 돼지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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