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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돼지의 가축화

한반도에서 돼지의 가축화

가축이란 인간에 의해 서식 환경, 먹이, 번식 과정 등이 관리된 결과 야생의 원형종과 확연히 구별된 형질적, 생리적, 행동적 특성을 지닌 새로운 종으로 변화된 동물을 일컫는다. 서남아시아와 중국 등 작물화나 가축화 주요 중심지에서는 식물의 작물화 과정과 동물의 가축화 과정이 거의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 야생식물의 작물화가 다소 일찍 시작되며 뒤이어 야생동물을 길들여 가축화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그러나 순화 과정이 1차 중심지가 아닌 외부에서 순화종 또는 순화에 대한 개념이나 기술 등이 전해진 지역의 경우는 여러 환경적, 기술적, 문화적, 사회적 원인으로 인해 특정 작물이나 가축이 선택적으로 전달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축사육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인식의 부족으로 가축사육에 대한 기초 자료 조사조차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개의 경우는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하는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소와 말은 야생종이 한반도에 자생하지 않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반면 돼지의 경우는 원형종인 야생멧돼지가 한반도에 서식하고 있고, 구석기 시대 이래로 주요 수렵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형질적으로 야생종과 사육종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야생종과 사육종을 구분하는 명확한 판별 기준을 마련하여 각 자료를 하나하나 검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남한의 고고학자들의 이런 조심스러운 접근과는 달리 북한의 학자들은 북한내의 고고학 유적을 연구하여 나름의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김일성대학에서 출판된 한국 과학사에 의하면, “사람이 일찍부터 기른 짐승은 개와 돼지였다. 돼지는 원시농업을 하던 사람들이 흔히 기른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돼지를 기른 사실들이 밝혀졌다. 반면에 가축사육을 주되는 생업으로 삼고 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돼지를 기르지 않고 양이나 염소를 비롯한 그 밖의 짐승들을 기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조선 옛 유형 사람들이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경부터였다고 추정된다. 그것은 집돼지뼈가 신석기시대 전기의 유적들에서 발굴된 일이 없고 신석기시대 중기와 그 이후 시기 유적들에서 발굴되기 때문이다. 집돼지가 발굴된 유적으로서는 서포항유적 4기층과 범의구석유적 1문화층, 곽가촌유적 1기층 및 2기층을 들 수 있다.

돼지가 고기 생산을 목적으로 처음 가축화된 것은 돼지가 다음과 같은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나 말과는 달리 몸집이 중형이므로 산 채로 잡는 것과 가둘 우리를 만드는 것이 쉽다. 그리고 성장발육속도가 빨라 10∼12달 기르면 도축하여 조리할 수 있고, 한 배에 낳는 새끼 수가 많으므로 쉽게 증식시켜 나갈 수 있다는 등 다른 짐승에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신석기시대에 가축을 작은 규모에서 부업적 형태로 길러왔다. 이 시기는 고기에 대한 수요를 야생짐승을 사냥하여 충족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지금까지 판명된 가축 뼈는 개와 돼지의 뼈들이다.” 여기서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10000년에서 기원전 2000~1500년을 말하는 것으로 북한 학자들은 우리민족이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시기를 기원전 2000년도 더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 학자들은 기원전 2~3세기의 사천 방지리 유적의 출토 예가 가장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 사천 늑도 유적과 아산 갈매리 유적에서 출토된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육의 증거를 확인하기 힘들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영남지역에서는 초기 철기~삼국시대 전기에서 사육 종 돼지가 소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철기시대 전기는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1년이다. 철기시대 전기를 기원전 300년으로 보았을 때 남북한의 돼지 사육 시기는 1000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남북한 지역 고고학자 간의 학술적인 의견 차이보다는 실제 한반도 내에서 돼지의 가축화 시기가 남북한의 시간 차이를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한국과학사 고대 가축사육에 따르면, 사냥한 짐승은 즉시 소비해야 하지만, 가축은 필요에 따라 도축하여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저장 식품과 같고 또 시일이 지남에 따라 (번식하여) 늘어나는 식품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우월성으로 인하여 가축사육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특히 짐승먹이가 많은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는 일찍부터 가축사육이 발전하여 목축업으로 전환되었고, 가축이 주요 식량자원이었다. 예를 들면, 눈강 및 송화강 중하류 일대의 평원에서 생활한 부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축사육은 중요한 식료 공급원의 하나였으며 마침내 목축업으로 발전되었다.

백금보류형의 유적들에서 나오는 일부 새김무늬그릇에는 양과 말, 낙타 등 가축의 떼가 몇 개의 선과 점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목축업이 이 지역의 주요 생산부문임을 말해준다. 백금보류형의 유적들에서 나온 짐승 뼈 가운데서 낙타의 뼈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와 말, 양, 돼지, 개 등 가축 뼈는 많다.

 이러한 유물자료들은 백금보류형 주민들이 가축사육을 매우 중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금보류형 주민들의 목축업은 가축 먹이를 따라 가축 떼를 끌고다니는 유목방식은 아니었다. 백금보류형의 유적들의 두꺼운 문화층과 견고한 움집, 곡식 보관을 위한 저장움과 다종다양한 화식기류는 그들이 한 고장에 오랜 기간 머물러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실증하여준다. 그들의 농법이 비교적 발전되었다는 것을 백금보류형의 유적에서 발굴된 150㎡ 범위 안에서 작물수확용 조개반달칼이 40여 개나 나왔다는 사실이 잘 말하여준다. 그러므로 백금보류형 주민들은 한 고장에 정착하면서 농업을 기본으로 하고 목축업도 중시한 정착적인 반농, 반목축경리를 한 주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기록이 보여준 부여 사람들의 반농, 반목축적인 경리형태는 바로 그보다 앞선 백금보 유형시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기온이 따뜻하고 농업이 보다 적합한 평야와 언덕, 계곡과 분지가 전개되어있는 길림, 장춘 지방의 송화강 중류와 요하 중하류 이남 지역들에서는 목축업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농사를 짓는 것이 보다 유리하였다. 이 지역들에서의 가축사육에서는 돼지가 위주였다는 것은 유적들에서 나온 가축 뼈의 압도적 다수가 돼지 뼈였다는 사실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유적에서 나온 돼지 뼈를 보면 돼지 주둥이가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이미 돼지에 대한 종축 작업이 겉모양 평가에 의하여 실시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돼지 겉모양 평가에서 그 주둥이 길이는 돼지의 고기 생산성 평가의 하나의 징표로 되어있다.

주둥이가 가늘고 길면 거친 사양관리조건에 적합하며 고기 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종축으로 고르지 않고 있다. 주둥이가 짧으면 성질이 온순하고 먹성이 좋다 보니 고기 생산성이 높아서 종자돼지로 고르고 있다. 이상 내용은 청동기시대 말경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겉모양에 의한 돼지 고르기를 실시하여 보다 생산성이 높은 돼지로 개량하는 공정들이 실시 되었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돼지의 고르기, 이것은 그 당시 방목관리를 위주로 하고 유목민 식 돼지관리가 아니라 돼지를 우리에 넣어서 집 주변에서 관리하는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한 고고학자 모두 가축을 걸어 다니는 고기 저장소(walking larder) 또 하나의 저장 수단으로 보았다. 한반도의 풍요로운 수렵 자원은 동물성 식료를 삼국시대 이후에도 가축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사냥으로 충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자연 환경적 조건에서 야생 사슴, 멧돼지 등을 사냥하는 것이 가축사육에 요구되는 비용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를 감당하는 것 보다 용이했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육 종 돼지가 지닌 유일한 용도인 육류 공급은 생계 경제적 측면에서 별다른 이점이 없는 셈이다. 육류의 질이나 종류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풍부한 야생동물 자원을 비교적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 환경에서 여러 가지 비용을 감당하며 굳이 사육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사육 종 돼지는 처음부터 육류 공급원으로 인지되고 도입된 것이 아니며 상당한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사육할 수 있으며 또한 사육하기 원하는 집단에 의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특정한 목적하에 사육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육 종 돼지는 그 사회 내에서 특정한 의례적 맥락에서 동물 희생의 일환으로 활용되었고 동시에 사회구성원 전체 또는 특정 집단이 차별적으로 섭취하는 행위가 수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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