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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돼지와 돼지문화

식육마케터 김태경 박사

선사시대 돼지와 돼지 문화

선사시대의 돼지와 돼지고기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광활한 영토에서 우리 민족이 유목과 농경문화가 혼합된 다문화 국가들로서의 긴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특히 식문화에서 있어 지역적 특징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수도권 인구집중으로 지역적 특색이 흐려질 만한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지역적인 식문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돼지의 가축화 시기 추정이 남북한 학자들 간에 상당히 시차가 있다. 이는 과거 돼지고기의 선호와 식문화는 특히 한수 이남과 이북 간의 차이가 컸음을 의미한다.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수 이북의 국가들과 백제, 신라 등 한수 이남 국가들의 돼지 사육과 돼지고기 (섭취) 문화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면에서 선사시대의 돼지와 돼지고기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시대는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정사가 있는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외국 문헌(주로 陳壽(진수)의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이나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해서 그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삼국시대 이전을 선사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지리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시대에는 북위 50° 부근까지 국토가 확장된 때도 있었지만, 신라통일 이후엔 북위 33~43°의 북반구 중위도의 온대에 위치한 반도국이다.

고조선, 부여 시기는 만주 벌판 및 요하 유역까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문화가 쉽게 전래되어 발달했다. 북쪽으로는 육로로 대륙과 연결되고, 동, 서, 남쪽으로는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바다 삼면의 해안선 길이는 약 8,700km에 달하여 해양문화가 일찍이 발달하면서 남방문화의 유입도 가능했다. 내륙은 산악지대, 평야, 분지, 계곡, 강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이런 자연과 지리학적 환경에서 한국인은 다양한 생활 습성을 형성했으며, 다양한 음식의 조리 및 저장 방법을 터득하고 꾸준히 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선사시대의 돼지 

가축사육은 농사와 함께 사람이 농경사회 생활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식량 생산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진전이며, 오랜 기간 사냥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에 기초하여 시작된 새로운 생산부문이다. 사람들이 짐승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사냥으로 획득하던 고기나 털, 가죽을 더욱 쉽게 얻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가축화를 위해 사람이 먼저 기르기 시작한 짐승은 개와 돼지였다.

돼지는 원시 농업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흔히 기른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원시시대의 돼지는 뱀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주는 역할이 컸다. 돼지의 가죽과 지방은 뱀의 독으로부터 돼지를 지켜주었다. 돼지는 잡식성이라 뱀도 잘 먹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돼지를 기른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사냥한 짐승은 곧 소비해야 하고, 건조방식으로 소비 기한을 늘릴 수 있다. 가축은 필요에 따라 소비할 수 있으므로 저장된 식품과도 같으며, 또 시일이 지남에 따라 번식으로 그 양이 늘어나는 식품이기도 하였다. 가축은 영어로 ‘livestock’이다. 이 단어는 ‘live’(살다, 살아있는) + ‘stock’(저장, 저장품)이니, 가축은 살아있는 저장품인 셈이다. 이와 같은 특장점으로 인하여 가축사육은 급속하게 보급되어 갔다. 

사육된 가축을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기 위한 목적도 가축화의 큰 이유였다.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희생물로 쓸 가축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산채로 희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먹이가 풍부한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는 일찍부터 가축사육이 발전하여 목축업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이 지역에서 가축은 인간의 주요 식량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예를 들면, 넌장강 및 쑹화 강 중하류 일대의 평원에서 생활한 부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축사육은 중요한 식량 생산부문의 하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목축업이 발전하였다. 

서기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는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국(槖離國)에서 왕의 시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도지가 입김으로 아이의 몸을 녹여주어 죽지 않았다.” 여기서 탁리국의 돼지가 살려준 아이가 곧 부여(夫餘)를 건국한 동명(東明)이다.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부여는 돼지와 깊은 인연을 가진 나라이다. 부여는 말, 소, 개, 돼지 등의 이름을 따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저가(豬加)의 관명(官名)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돼지 이름을 딴 이름이 저가(豬加)이다. 

우가(牛加), 마가(馬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 猪加·狗加 大使·大使者·使者(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하는 구절이 있다. 가(加)는 다른 부여계열의 직제에도 나타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니 원래는 씨족장, 부족장을 뜻하는 말이었다. 즉 가(加)는 처음 족장의 명칭에서 시작하여 대관, 장관의 직명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은 가(加)에 대하여 馬, 牛, 猪加(마, 우, 저가)등의 가축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역시 고유색을 띤 것으로 목축경영시대의 축군자본별(축산별)에 의한 족장의 칭호가 그대로 계급분화에 잔존 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관직의 높은 관직명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축을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여는 소, 개, 말과 함께 돼지를 키웠다. 가축을 잘 기르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부여 관련 기록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여 지역이 돼지를 키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본래 숲 지대나 그늘진 강둑에 사는 동물이다. 나무 열매 또는 과일, 식물 뿌리 등을 먹으며 산다. 부여가 위치한 만주 지역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목재를 생산하는, 드넓은 나무 바다(樹海)가 펼쳐진 곳이다. 644년에 편찬된 진나라(晉- 265~419)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의 <숙신씨(肅愼氏)> 기록에는, “이 나라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 기록, “그 나라에는 가축으로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 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라는 내용과 거의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엔 탐라국으로 보이는 ‘주호(州胡)’가 기록되어 있다. 마한 서쪽 바다의 섬에 있는 주호국의 생활풍습을 소개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작고 머리는 깎은 채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데, 위의 것은 있으나 아래의 것은 없다. 소와 돼지를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여 한(韓)과 교류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3세기에 이미 제주도에는 소와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정착하고 농경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대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혼(靈魂)의 존재를 인식하고 여러 가지 제사의 의식을 행하였다. 그 시대는 권력자가 천하를 잡으면 자기 자신을 하늘의 아들이라고 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이때 반드시 올리는 희생물로서 동물 (소, 돼지, 양, 개 등)을 사용하였으며 제사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희생물의 피와 고기를 나누어 먹고 서로 간의 융합 일치를 다짐하였다. 희생과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가축을 대가로 지불하는 가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여자를 친정에서 데려가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내주게 마련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는데, 이 풍속은 흉노의 것과 같다. 이 나라에서는 제사용 소를 잘 기르고, 이름난 말(그리고 붉은 옥, 아름다운 구슬도)이 난다.(.....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其國善養牲. 出名馬(.....))라고 나온다. 부여의 제천행사 영고가 있었다. 제사에 필요한 희생용으로 가축을 키웠으며 제사가 끝난 뒤에 식용으로 이용하였다. 또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숙신씨라고 했던 읍루에 “돼지를 많이 길러서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고 그 기름은 몸에 발라 방한에 이용하였다.” (其俗好養豬, 食其肉, 衣其皮. 冬以豬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는 기록으로 보아 돼지를 식용으로만이 아니라 돼지 기름을 이용하여 방한도 하였다. 겨울철에 돼지기름을 몸에 바른다는 뜻은 무엇일까? 우선 겨울에 많이 잡아먹었다는 말이다. 열량이 많은 돼지고기로 추위를 이기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최근까지 여름 돼지고기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겨울 피부는 거칠고 트게 마련이므로 피부 보호용으로 기름을 발랐고 이는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 효과도 있었다. 읍루는 돼지를 많이 길러서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도 해 입고 털을 짜서 포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죽은 사람은 관에 넣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돼지 털을 이용해서 옷감을 만든 건 더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것이다. 희생물 돼지와 함께 제사용 돼지 그리고 사망자의 양식이 되는 돼지는 사람이 살아서 먹은 그 좋은 음식인 돼지고기는 죽어서도 좋은 음식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돼지가 제사용으로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오늘날도 가정 제사, 마을 제사, 기우제 그리고 무당굿에도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린다. 돼지머리가 돼지 한 마리를 의미한다고 보면, 돼지가 제사에 꼭 필요한 희생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이나 죽은 자가 돼지를 제물로 받고 양식으로 받는다는 것은 읍루의 기록으로 볼 때 실로 장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겠다. 

 앞의 제주도 주호국에서는 가죽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돼지를 집에서 사육함으로써 파충류의 접근을 막는 역할뿐 아니라, 분뇨를 이용하여 농토의 지력을 유지하고 증대하는 역할도 짐작된다. 돼지 뼈나 이빨은 일상에 좋은 도구가 되었다. 또한, 신통력을 지닌 신성한 동물로 인식하여, 지신과 풍요의 기원, 돼지꿈 돼지 그림, 업돼지 등에서 길상으로 재산이나 복의 근원, 집안의 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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