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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와 발해, 통일 신라 시대의 돼지

삼국시대와 발해, 통일 신라 시대의 돼지

삼국시대 시대적 배경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는 시대이다. 이 세 나라는 고구려는 B.C.37년 동명성왕이 국내성에 도읍을 정했다. 백제는 온조대왕이 B.C.18년에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서 건국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림(지금의 경주)에서 시조 박혁거세가 B.C. 57년에 경상도 일원을 주축으로 신라를 세웠다. 삼국시대는 완숙된 철기 문화를 흡수하여 생산기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고 농경 생활의 확립과 발전을 보았으며 한자를 통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중국을 거쳐 불교 문화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를 기틀로 하여 삼국시대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불교가 삼국에 전래됨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문명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주었는데 신라의 법흥왕 16년(529)에 살생금지령이 내렸다. 백제의 법왕원년(599)에는 “매의 사육을 금하고 사냥이나 어로의 기구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교의 살생금단(殺生禁斷) 사상으로 생물을 죽여서는 안 되고 그 고기도 먹지 못하게 한 교리가 축산 발전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유교에서는 육식을 허용하였지만, 함부로 살생하는 것을 금하였고, 특히 상을 입었을 때는 일정 기간 육식을 금하였다. 이처럼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은 농경을 위주로 하는 산업 구조와 계급사회에서 사냥과 축산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미미하다. 축산과 도축은 사회적으로 천한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고구려의 돼지

고구려 시기에는 돼지를 관청에서 길렀고, 개인들도 길렀다. 당시의 봉건국가에서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는데, 거기에 장생이라는 관리를 두었다.

『삼국사기』 13권 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21년 3월 조에는, "교제(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쳤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령하여 이를 쫓아가게 하였다.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국내(성) 사람의 집에 가두어 두고 기르게 하였다."고 씌어 있다.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인 교시(郊豕)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19년(기원전 1)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長屋澤) 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다리 근육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祭天)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한 것이냐.’ 하며 두 사람을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희생물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었으며, 희생용 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이를 뒤쫓던 관리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이 지역이 수도로 삼기 좋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기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게 된 것이다.

이 내용도 보면 제천의식용으로 희생돼지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두어 기르고 있었다. 그 돼지가 궁중 양육장을 떠난다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라 위기를 조성할 것이므로 우선 왕이나 담당 관리는 불길하게 여긴다. 새로운 돼지로 대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시(郊豕)를 꼭 찾아서 써야 한다. 만약에 그 교시를 사람이 상하게 하거나 죽게 한다면 하늘을 진노하게 하는 것이고, 고구려에 재앙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 사람은 중죄를 지은 것이라 벌을 받는다. 

바로 유리왕 19년 8월 그런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돼지가 사람보다 중하는 뜻이니 돼지=하늘=국가라는 등식이 바탕으로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돼지 이동=하늘의 뜻 이동=국가 수도의 이동이라는 뜻으로 전진하고 그 이동의 의미는 사직(社稷)의 이동이 되었다. 왜 수도를 옮기는가? 그곳이 오곡이 풍성할 땅이라 백성의 이익을 위할 수 있다고 했으니 경제요, 직(稷, 오곡의 신)이요, 단군신화의 주곡(主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곳은 병란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국방이요, 사(社, 토지신)요, 단군신화의 주명(主命)에 해당이 된다. 사직(社稷)은 오늘날 국방과 경제, 영토와 국민이라는 3대 국가요소인데, 위 삼국사기를 보면 하늘이 지상 국가를 좌우하고 그 천지간의 매개자가 희생물인 돼지라는 것이다. 

이 돼지는 수도 곧 왕도를 정해주었다. 하늘이 새로운 발전되는 고구려로 일신시켜준 대사건이었다. 희생하는 목적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국토를 지키고 넓히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편하게 해주고자 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왕이 그리해야 하고 왕도를 잘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도록 하늘에 소청(所請)하는 것이라면 이 내용의 돼지가 간결하게 이를 밝히고 있다. 실로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해주는 영물이다. 오늘날 살이 찌고 잠을 많이 자고 미련하거나 단순히 돼지 꿈을 꾸어서 돈을 얻는다는 차원과는 판이한 왕의 사도요 국가와 국민의 염원(念願)이다. 곡식을 해치는 돼지가 아니라 곡식을 풍년들게 해주고 땅을 비옥하게 해 주고 백성을 배부르게 해 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구가 국력이요 또 넓은 영토가 국력이다. 입지조건이 좋은 수도가 국력이라는 점에서 이 돼지는 인구를 늘리고 국토를 신장시킬 수도를 정해주었으니 평범한 인간보다 소중하다는 말이다. 인구를 늘리는 일은 인재를 얻는다는 말도 된다. 유리왕조에서 보듯 위사물이라는 인재를 얻었다. 이는 그곳 인심을 파악하고 지지를 얻은 것이며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돼지의 다산성과 대식성과 건강성이 확대되어서 국민의 증가, 국력의 확대 사직의 안정의 뜻으로 정착이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208년 교시가 달아나자 관리들이 쫓아가다가 주통촌(酒桶村)이란 곳에서 후녀(后女)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게 되었다. 관리들이 후녀에 대해 임금께 이야기하였고, 마침내 임금이 후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 성 밖의 돼지)’라 하였는데, 그가 곧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세습왕조 시대에 왕이 왕자를 두는 것이 곧 국가의 안녕이고 존속이다. 반면 뒤를 이을 왕자가 없는 왕은 비극이다. 고구려의 산상왕이 삼국사기에 의하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산상왕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산상왕은 왕자가 없는 형 고국천왕의 아우로 왕이 되었다. 그는 왕자라는 후계자가 얼마나 중한지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형수이면서 고국천왕 왕비인 우(于)씨가 시동생인 산상왕을 지지하고 혼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 2년에 왕비가 되었다. 고국천왕이 19년을 재위하였으니 18년간 왕비 노릇을 하였는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그 뒤 산상왕의 왕비가 되었는데 7년이 되도록 왕자를 두지 못하였다. 이것을 보면 불임은 왕후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은 아내를 얻지 않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산상왕 즉위 7년 3월 왕은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매 보름날 저녁 하늘에서 새 작은 왕후를 통해서 왕자를 보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새 작은 왕후인 소후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런 번민과 기대 속에서 5년이 흘러 즉위 12년에 드디어 소후를 만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돼지가 마련한 것이다. 희생용 돼지인 교시가 도망을 가니, 담당 관리가 잡으러 갔는데 쉬 잡히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주통촌이라는 곳에 당도하였는데 20세 되는 아름다운 여자가 웃으면서 잡아 주었다. 교시를 찾아온 신하는 왕에게 이 처녀 이야기를 하고 왕은 즉시 찾아가서 잠자리를 같이했다. 왕후 우씨가 질투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주통촌 여자가 임신한 것을 알고 죽이지 못하였다. 그 여자는 왕자를 낳고 소후가 되고 궁중에 들어왔다. 돼지가 중매를 서고 왕자를 두게 하여 사실상 민간과 왕궁이 결합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이는 하늘의 뜻과 일치하는 돼지가 하늘인 셈이다. 왕은 즉위 13년 만에 후계자로 삼아 소원을 성취하자 그 왕자를 아예 이름을 돼지라고 불렀다. 한문으로는 교체(郊彘)이다. 이 돼지 왕자가 다음 왕인 11대 동천왕이다. 이 왕자를 본 그해에 수도를 환도성(서기 198년 지금의 즙안)으로 옮겼다. 그렇다면 돼지로 인해서 왕도를 옮기는 사건이 2대 유리왕 이후에 또 생긴 것이다. 국민의 번창인 다산성은 물론 경제와 국방의 상승과 왕국의 안정을 돼지가 도모한 것이다. 가히 국운을 돼지가 결정한 셈이다. 

왕자 돼지는 후에 우위거(優位居)라는 정식 이름을 갖고 있다가 대를 이어 동천왕이 되었다. 그는 성품이 대단히 너그러웠다. 그때 고구려 백성은 너그러운 왕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왕을 기대하였는데 이것을 충족할 수 있었다. 이렇다면 돼지는 민심을 상징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이상에서 돼지는 하늘, 왕, 백성이라는 국가의 구성 요소에 다 긍정적으로 작용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한 평범한 돼지가 아닌 신통력을 가진 거의 신화적이고 정치적인 위력을 가진 것이다. 수도를 새로 정해주고, 동천왕을 탄생할 수 있게 하였으니, 고구려에서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길만했다. 

고구려 수도의 남쪽 교외에는 봄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고, 북쪽 교외에는 하지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다. 이 관영 돼지목장의 돼지 사육 규모와 사양관리기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제사에 쓸 용도이었으므로 한두 마리를 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일정 규모의 목장형태를 갖추었을 것이며, 사양관리도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봉건국가가 운영한 돼지목장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돼지고기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기 음식인 맥적(貊炙)은 멧돼지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중국의 책 '수신기(搜神記)'에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고기구이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불고기 음식이다.

맥적은, (멧) 돼지를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 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굽는다. 이는 간이 깊게 배어 있고 구워낸 맛이 고소해서 중국에도 전해졌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노루, 소, 개 따위의 고기도 좋아했지만, 돼지고기를 특히 즐겨 먹었다. 중국 책 '수신기'에는,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로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음식이며, 이웃 나라에도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 맥(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맥은 그들로 봐서는 동이족이다. 그리고 적(炙)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 굽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의례에서 모든 적은 무장이라 하였고, 이미 조미해 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고기 요리는 전통적으로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묻혀 먹는 데 비하여, 적은 미리 조미하여 굽기 때문에 일부러 조미료에 묻혀 먹을 필요가 없으니 무장(無醬)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맥적이란 미리 조미하여 직접 구운 맥족의 고기 요리를 가리킨다. 맥적이란 고기에 부추나 마늘을 풍성히 넣고 미리 조미하여 구워 먹는 것이니 미리 조미한다는 점에서 불고기의 원조라 볼 수 있다.

고구려인이 육식을 즐겼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은 그의 형수였던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인 우씨 왕후의 방문을 받는다. 산상왕은 왕후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하자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 손가락을 싸매준다.

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이 660년경에 편찬한 사류부(事類賦)인 한원(翰苑)에는, 고구려인이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패용한다."라고 했다. 안악3호 고분의 벽화에는 부엌 옆에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둔 육고(肉庫) 그림이 있는데, 꼬챙이에 걸린 그림에서 사슴과 돼지고기를 볼 수 있다. 안악 3호 무덤의 벽화에 푸줏간과 걸려 있는 돼지고기는 개인이 기른 돼지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돼지를 기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먹이 문제인데 돼지 사육에 쓰는 사료는 곡물이다. 곡물 특히 콩의 껍질과 줄기 등의 부산물은 돼지 사육에 있어 사료로 중요하게 활용된다. 농업생산량이 증대할수록 돼지의 사육도 증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네 맥족이 거쳐온 대초원에서 특이한 냄새를 가지는 채소인 부추가 수없이 야생하고 있었다. 또 우리 건국신화에 곰이 마늘을 먹고 여자로 환신(換身)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고기는 썩기 쉽고 비린내가 난다. 여기에 부추나 마늘을 섞으면 부패가 방지되고 맛이 한결 좋아진다.

 ‘고려 이전 한국 식생활사 연구’에서는 중국의 제민요술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제민요술에 의하면, 가공, 조리에 쓰이는 육류로는 돼지, 양, 집오리가 가장 빈도가 높고, 다음으로 소, 거위, 닭의 순이고, 말과 개도 쓰이고 있다. 야생짐승으로서는 사슴과 노루가 닭 정도의 빈도로 쓰이고, 곰, 멧돼지도 있다. 이는 6세기 전반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제민요술을 통해 고구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육류를 가공 조리하자면 우선 도축해야 하는데 이에 관한 문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산석이나 벽화에 도살하는 모양이 그려져 있다. 소의 이마에 일격을 가하는 오늘날의 도살법이 벌써 그려져 있다. 또 양을 거꾸로 매달아서 목에다 칼자리를 넣는 것 같다. 그리고 탈모, 해체의 모습도 보인다. 

중국 당나라때 역사서 북사에는 소개된 고구려 풍습에 “시집 장가드는 데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혼례를 치른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문헌을 보아서도 고구려에서는 관혼상제 중 결혼식에도 돼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인는 돼지가 고구려인과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에는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안시성 안에서 닭과 돼지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상당한 숫자의 돼지를 사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唐)나라의 재상(宰相) 두우(杜佑:735∼812)가 편찬한 제도사(制度史) 통전에는 “가축으로는 소와 돼지가 있다. 돼지는 흰색이 많다.” 라고 되어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흰돼지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돼지고기 음식 문화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식품 가공법은 장양(藏釀)이다. 장양은 발효시키는 것이다. 곡물, 채소, 육류, 어류 등 모든 식재료로 만들 수 있다. 고구려 장양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豉(메주 시)와 醬 (젓갈 장)인데, 장에는 육장과 어장도 포함된다. 이때 채소로 만든 장양인 菹 (채소절임 저)와 漬 (담글지)는 겨우내 먹을 채소를 담가 저장하는 것이다. 현재 김장 문화의 시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음료 또한 장양을 통해 만들 수 있는데, 술과 단술, 酪(식초,진한육즙 락)이 대표적인 장양 음료이다. 중국 문헌에는 고구려인들이 선장양(善藏釀) 한다고도 기록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음식 가공법 가운데 장양이 고구려 음식문화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대표하는 음식풍습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생식은 날 것 상태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생식은 주로 수산물을 포함한 육류 및 채소류나 과일류를 주로 날 것으로 소비하게 된다. 육류의 경우 갓 도축한 신선한 육류를 회(膾)의 상태로 먹는다. 소나 돼지, 사슴, 고라니 등의 육류 및 여러 생선들이 회의 재료가 된다. 

건조는 국물류나 육류 및 어류, 식물류 등의 수분을 제거하는 행위다. 육류의 건조는 포(脯)인데 육류뿐만 아니라 채소류나 과일류를 건조한 것도 포라고 한다. 이러한 포는 자연 건조시키는 방법이다. 이때 소금이나 장즙 등을 첨가하여 말린다면 부패를 막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풍미를 더하는 음식이 된다. 포는 제사를 비롯한 다양한 상황에서 대표적인 음식으로 쓰였을 것이다. 한편 연기나 열에 그을려 말리는 건조방법도 있다. 훈연음식이 그것인데 수산물을 포함한 육류가 모두 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안악3호분 육고도 안쪽에는 경옥(京屋)이라는 한자가 쓰여져 있어 고구려 특유의 다락창고인 부경(桴京)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수렵을 통해 잡은 사슴이나 노루 (멧)돼지 및 몇몇 고기덩이 등이 이곳에 걸렸다. 소금을 뿌려 건조시킨 것이거나 훈연 및 자연건조를 거친 고기덩이들을 걸어 보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육류는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말려지거나 훈연 되어 건조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훈제된 고기는 특유의 향과 함께 다른 식물과 곁들여져 먹어도 풍미가 좋았을 것이다. 장기간 보관하기도 좋으며 부피가 작아서 공간을 작게 차지하는 저장 음식이다. 기름기가 적은 육류의 부위를 깨끗이 씻어 소금에 절인 후 훈연한 육류는 지금의 베이컨처럼 된다. 

화식은 불에 익히거나 삶은 음식이다. 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표적인 것은 직접 굽기 번(燔), 싸서 굽기 포(炮), 나뭇가지 등에 꿰어서 굽기 적(炙)이 있다. 이 방법 중 고구려에서는 꿰어서 굽는 적법이 유명했다. 적은 본래 불위에 식재료를 놓고 굽는 것으로 긴 막대에 고기를 꿰어 불에 돌리면서 굽는 형태를 취한다. 식재료를 절단하여 굽는데 육류나 어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식재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적은 미리 양념을 해서 굽기 때문에 찍어 먹는 장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적은 맥적이라고 불리며 고구려의 대표음식이다. 이 맥적의 특징은 일반적인 적과는 달리 잘게 자르지 않고 육류를 통째로 양념하여 굽는 것이다. 현재 맥적에 관해 간혹 고구려의 음식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맥적이란 음식명은 맥족의 구이 음식이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맥족 계열에 고구려가 포함되고 있으므로 맥적은 고구려 고유의 구이 음식이다. 

육장은 고대에 상당히 많이 소비되었으며 그 종류도 다양했다. 육장은 고기류를 항아리에 넣고 소금이나 술 및 술과 관련된 양념류 등으로 절여 발효시키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절이는 과정에서 발효된 고기류는 발효되기 전과 다른 새로운 풍미를 자아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육장을 담갔다는 직접적 기록은 없다. 다만 수렵이나 목축에 능했던 고구려에서 동물의 고기나 내장 등을 이용한 육장이 발달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추측된다. 중국의 육장과 비교하여 고구려에서도 비슷한 종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고구려에서 육류는 목축과 수렵으로 얻을 수 있었다. 고구려가 목축한 가축에서 특징되는 것은 소, 말, 돼지다. 소는 농사와도 관련되는 역축으로서 고구려에서 쓰임이 많았다. 말은 국마로서 사육되었다. 돼지는 주로 식육재로 활용되어 일찍부터 길러졌다. 특히 돼지의 경우 농업의 발달과 돼지 사육은 별개의 산업이 아닌 유기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점령지의 음식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문자명왕 때인 494년 부여가 항복함에 따라 영토를 송화강 중류 일대로 넓힌다. 594년 영양왕 5년에는 북방의 말갈을 정복하고 점령하여 말갈 지배하에 있던 부여를 수복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부여 점령은 고구려인의 음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부여는 나라 대부분은 산릉과 넓은 늪지이며 동이의 땅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다고 한다. 부여의 토질은 오곡에 적합했다. 부여에서는 조와 콩을 생산하고, 간음하거나 투기로 죽은 여자의 시신을 남산 위에 두어 썩게 하였는데 여자의 집에서 시신을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내야 시신을 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부여 복속은 고구려의 음식 문화에 오곡 및 육축이 보다 친연되는 관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여러 정복전쟁을 통해 길림성 지역의 초지를 얻은 후 기른 여러 가축은 고구려인들의 육류 문화를 정립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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