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백제, 발해의 돼지
신라, 백제, 발해의 돼지에 대한 기록은 귀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에는 백마가 나온다. 신라의 또다른 김알지 신화에는 닭이 나온다. 이 두 신화에 말과 닭이 나온다. 고구려의 돼지 이야기들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신라인들은 설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쥐, 까마귀와 더불어 猪 (돼지 저)의 세 가지 동물이 관련되어서 정월의 맨 처음에 드는 그들의 날을 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21대 소지왕때 왕이 궁중의 불길한 일로 인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졌는데 마침 위의 세 동물의 지시에 힘입어 구출되었다. 왕은 이 은혜를 갚기 위하여 정월의 첫 자(子), 牛(우), 亥(해) 일을 忌愼日(기신일)로 정했다. 신라에서 설날이 그렇게 시작되고 이에 돼지(亥)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돼지가 그만큼 신성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 역시 고구려처럼 권력 유지에 돼지가 깊숙이 관련되지 않았어도 일상에서는 돼지를 신성시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가축과 육류 전반에 관한 신라, 백제, 발해를 알아보자. 신라의 육류는 수렵이나 목축을 통해 이루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수렵 관련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수렵은 먹거리인 육류를 확보하는 방법이었지만 제례, 군사훈련 및 정치적 목적등 고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일반 백성들에게 수렵은 고기나 모피를 얻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수렵은 농사가 주업이 되어 농업생산이 늘고 가축사육도 늘어서 점차 비중이 감소하였다. 수렵으로 멧돼지, 사슴, 노루, 토끼등을 주로 잡았다. 많은 유적지에서 사슴, 멧돼지, 노루의 뼈가 출토되고 있다. 사슴과 멧돼지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주요 사냥감이었다. 야생조류 가운데서는 꿩이 가장 많이 애용되었다. 문무왕은 매일 음식으로 수꿩 9~10마리를 소비했다고 한다. 과장된 표현일 가능성도 있으나 신라인의 식생활에서 육류가 중요하였고 그중 꿩이 대표 육류였음을 말해준다. 육류의 보다 안정적인 공급은 축산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문무왕대에 목장이 174 곳이었으며 각기 나누어 관리 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말 목장의 사례이긴 하나 목축 정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사육되는 가축은 소, 돼지, 닭 그리고 개가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와 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농경사회가 진전될수록 수렵의 비중은 급감하고 개, 돼지, 소, 닭 같은 가축에 대한 사육이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가축의 사육 목적이 주로 말과 소는 역용으로 주로 활용되었고, 이런 용도가치가 없는 돼지, 개, 닭 같은 가축들은 식용으로 이용되었다.
신라는 불교의 영향이 삼국 중 다른 나라보다 심했고 또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는 성덕왕 4년 705년 살생을 금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10년 711년 가축의 도축을 금지하는 엄명이 내려졌다.
불교는 처음에는 상류층부터 퍼져 나가고 정치와 결부되어 국민의 식생활을 크게 제약했던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라의 식생활에는 육류가 차지하는 위치나 비중이 대단히 낮았다고 추측된다.
일본 정창원(正倉院- 나라현 도다이사에 위치한 왕실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81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에는 지금의 청주(淸州) 주변 4개 촌락의 인구, 토지, 나무와 함께 가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4개 촌락에 말 61마리, 소 53마리와 그 증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돼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농민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와 말에 비해 돼지를 키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개도 집에서 많이 키웠을 것인데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역축에 대한 언급만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488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이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신라> 조에 ‘재상의 집에는 소, 말, 돼지가 많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도 귀족들의 육식 욕구를 충당시켜줄 돼지를 키웠을 것이다.
신라의 육류 음식으로는 포가 있었다. 포는 고기를 말린 것이다. 신문왕의 혼인 품목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포는 당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짐작된다. 신라 음식문화를 엿 볼 수 있는 문헌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궐내에서 고기등의 음식과 관련하여 이를 전문으로 담당한 관청으로 삼국사기 권 29에 육전(六典)이 보인다. 성덕왕 12년에 전사서(典祀署)를 두었는데 제사에 사용되는 육류를 육전에서 조달하여 전사서로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는 [수서(隋書)] <백제> 조에, ‘백제에 소, 돼지, 닭이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 돼지와 관련된 상황을 깊이 알 수가 없다.
백제의 궁내부(宮內部, 내관(內官))에 축산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육부(肉部, 마부(馬部), 약부(藥部)등 있었다. 육부에서는 왕실에 소용되는 육류를 비롯하여 이것을 조달하기 위한 가축의 사육까지도 담당하였을 것이며 마부에서는 궁정에서 사용하는 수레끌기와 승용마의 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약부에서는 역시 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약재를 구매하고 관리하는 관청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 국가 전체와 관련된 행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국가적인 축산관계 사무는 마정에 관한 한 사군부에서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겠으나 일반가축의 증식이나 개량에 관한 행정은 어느 부서가 맡았는지 확실하지 않다.
백제 역시 신라와 같이 불교가 축산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법왕 원년 12월 살생금지령을 전국에 내렸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서 기르던 사냥용 매를 놓아 보내고 어렵용구를 다 태워 버렸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백제에서 말은 국가의 목장이나 귀족계급에서 소유하였을 뿐 일반 백성이 사육 이용하기가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소는 농사용으로 사육되었다. 일반 백성은 닭, 돼지 등을 길러 제사용으로 이용한 후에 식용으로 하였을 것이다. 식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데다 사냥과 고기잡이도 못하게 금령을 내리는 마당에 집에서 기른 가축을 식용으로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금지령이 내린 이후 백제의 축산은 더욱 위축되고 후퇴를 면치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는 699년~926년 만주 동부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존재하였던 나라다. 말갈계의 고구려 사람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유장(遺將)인 대조영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면 만주지방의 숙신족(肅愼, 말갈족), 고구려 유민인 예맥족(濊貊)이 국민의 구성원으로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해는 지금의 평양을 경계선으로 한반도의 북쪽과 북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강토와 민족이 둘로 갈라져 남은 통일 신라, 북은 발해가 된 셈이다. 발해의 구성원인 말갈족은 주나라때는 숙신, 한나라때에는 읍루라고 불렀다. 이들이 고대 우리 역사속에서 목축과 돼지 사육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으로 보야 발해 역시 돼지가 많이 사육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해에서도 막힐부의 돼지가 유명하였다. 발해는 겨울은 춥고,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나 짧으며, 봄·가을은 메마르고 건조한 지역이다. 영토는, 동쪽으로는 연해주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니 아무래도 겨울이 길었다. 한겨울에는 오전 9시가 되어야 날이 밝고 오후 4시면 어두워졌으며, 기온도 매우 낮아 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갔다. 삼림은 무성하여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이 울창했다.
발해인이 즐겨 먹는 음식 중 첫 번째는 돼지고기다.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위를 이겨내려면 지방섭취가 많아야 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