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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가 한우의 조상이었을까?

물소가 한우의 조상이었을까?
조선시대 키우던 소에 대한 기록은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Watslav Sieroszewski)(1858∼1945)의 다음 증언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다. (중략)한국의 소는 키가 146∼150cm에 이루고 무게는 약 20푸드 (330kg)까지 나간다. 건강하고 활동성이 큰 것이 특징이고, 달구지에 40푸드(660kg)정도의 짐도 쉽게 나를 수 있으며. 산을 넘거나 물살 센 강을 건널 때는 그 어떤 가축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말들이 쉽게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곳에서 조차 소들은 쉽게 장애물을 피해 나간다. 발이 빠른 한국소들은 속도나 장시간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능력에서 말에 뒤지지 않는다.(중략) 한국소는 물소와 여러 차례 교배된 특징이 확실히 나타난다. 한국소의 큰 키와 강인함, 큰 활동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2006) 코레야 1903년 가을(러시아 학자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개마고원 

이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었다. 1885년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의 다데슈칼리안 공후 역시 “조선산 황소와 암소들은 힘과 인내력이 뛰어난데다 몸집도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고 했다. 
한국소의 이러한 특별한 외양과 능력은 오키나와에서 물소를 도입하여 교배한 결과로 보인다.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지음 p60
 이는 실록 지사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은 국초부터 활을 만드는 데 가장 긴요한 재료인 물소의 뿔을 생산하는데 관심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기르고 있던 소보다 더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지닌 물소를 논과 밭을 가는데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록 세종조를 보면 물소는 힘이 세고 밭을 가는 것이 보통 소의 두 배에 이를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물소는 털이 얇고 추위를 견디지 목하는 특성이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서는 겨울철에 우리를 지어 잘 보살피고 따뜻한 봄이 되면 살곶이에 내보내 기르는 방안을 시행했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의 남부에서 물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세조7년(1461)에 이르러서야 오키나와에서 암수 2마리의 물소를 들여올 수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물소는 경상도 웅천에서 겨울을 보내도록 한 후 서울로 가져와 창덕궁의 후원에서 사복시 관원들이 돌아가며 길렀다. 조선의 제반 의서에서 물소 기르는 법을 조사하고 이를 의생 4명이 배우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오키나와에서 들어온 물소는 잘 번식되었다. 17년이 지난 성종 10년(1479)에는 70여 마리로 불어났을 정도였으며 이후에도 번식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물소를 기르는 데 겪는 백성들의 고초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대신들에게 물소 암수 한 마리씩을 나눠줘 기르게 하고 남은 소들은 여러 도의 군현에 나눠줘 기르게 하는 방안이 대표적이었다. 성종24년 (1493)에는 이전까지 방목하던 물소를 아침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기 시작했다. 크게 번식된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농사일에 쓰려는 시도도 본격화했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p 60-61
 조선의 생태 환경사에 나오는 조선의 소에 관한 내용이다. 
한우의 조상이 오키나와 물소였다는 건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의 주장이고 물소는 소아과-소족-물소 속-물소, 일반 소는 소아과-소족-소속-소로 물소와 소는 교배가 불가능하다. 교배를 통해 설사 후대를 생산한다 해도 이류교배(disassortative mating) 이종교배라고도 하며 말과 당나귀를 교배시켜 생산한 노세, 호랑이와 사자를 교배시켜 만든 라이거 등이 여기에 속함. 이들 개체는 생식기능을 상실해 후대를 생산하지 못하며 자연에서는 이류교배가 일어나지 않는다.(편집자 주)
의 특징인 생식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게 번식학을 전공한 축산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조선시대 물소의 뿔은 각궁을 만드는 중요한 군수 물자였다. 물소 뿔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싶은 마음으로 물소를 수입해서 키워 본 것이다. 소의 노동력을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왕의 한 일은 역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런 물소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한우의 역우로의 능력이 물소와의 교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역사는 늘 권력자 중심으로 기록에 남는다. 조선시대 축산 관련 역사 기록중 소에 대한 기록이 많고 돼지에 대한 기록이 그에 비해 상당히 적다. 역사 기록뿐 아니라 일반 문헌 자료도 소에 대한 기록에 비해 돼지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일부에서는 소가 민중의 가축이고 말은 귀족의 가축이라 말의 장비등은 남아 있는데 소의 장비가 남아 있기 않다고 하는 건 말은 군사용이라 금속 장비를 많이 장착했다. 소는 지금의 트랙터 같은 농업분야에서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소쟁기나 달구기등 남아 있다. 조선시대 소는 일반 농가에서 키우기는 버거운 사치품이였다. 소나 말은 다 권력자의 가축이다. 
조선시대의 소는 역우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이 그 첫 번째 역할이었다. 이런 소의 역할은 1970년대초반까지도 계속된다. 1984년 축산학 개론에도 한우는 역우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한우는 육우다. 조선시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계급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소한마리를 도축하면 고기는 양반들이 먹고 남은 뼈와 내장등 부산물을 일반 백성들이 삶아서 장국등으로 만들어 먹었다. 우리에게 소는 늘 야누스적인 양면성을 가진 가축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가 너무 맛있다. 소 한 마리에서 백가지 맛을 찾아낸 일두백미의 맛을 즐길 만큼 소고기 맛에 반했다. 농경민족이면서도 소고기 먹는 것을 멈추지 못했던 건 아마도 우리민족이 유목민과 농경민족의 혼합된 다양한 민족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조선시대 특히 한양(서울)에서 소고기 육식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건 한양이 돈많은 권력자들이 몰려 살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조선의 이성계가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키웠기 때문에 조선 개국시 많은 동북면 사람들이 한양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일 수 있다.
 동북면은 본래 숙신국(肅 愼 國)의 땅이었는데 일명 읍루(挹 婁)ㆍ물길(勿 吉)ㆍ말갈(靺 鞨)ㆍ여진(女 眞) 등의 명칭이 있었다. 동북면 사람들은 전통적인 육식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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