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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 불고기 소고기 탐식의 역사


최남선 선생은 왜? 맥적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까?


맥적의 의미


역사 연구자의  시대적 자세로 생각해야 한다.


그냥 최남선 선생은 자신의 변절에 대한 한가닥 변명정도로 맥적이 우리 민족의 음식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걸 불고기의 원조로 이해한 건 흔들리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변명일 수도 있다. 



맥적과 불고기 


맥적이 불고기의 원조가 아니다. 라는 주장이 틀렸다. 맞았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왜?  맥적을 불고기의 원조라고 강조했을까? 


정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설하멱, 너비아니는 다 몽골 간섭기 이후에 등장한 쇠고기 요리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믿고 있는 고려 이전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이 육식을 자제하다 몽골의 간섭기에 몽골에서 도축한 법과 고기먹는 법을 배워서 육식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 


나 이 당연시 되고 있는 주장이 1978년 고 이성우 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일제가  우리 민족의 열등감에서 만들어 낸 거짓된 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도경의 도재편을  인용해서 이야기하지만 고려도경에 육식을 즐겼던 이야기도 많다. 이자겸의 생일 선물 같은 내용들은 고기가 권력자의 생일에 선물로 준 귀한 음식이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맥적이 불고기 원조다. " 이 사전에도 있는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리민족의 육식사에 대해서 다시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음식사를 이야기 할때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처한 오늘의 역사의식


맥적이 불고기이 원조라고 해야만했던 허약한 (우리 민족문화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사관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건강하지 못한 민족문화의 자존심이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을거다. 그때는 뭐 하나라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민족 문화를 가졌던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싶었던 자존심의 상징적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민족은 유목민과 농경민의 혼합 민족일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다양한 육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소고기를 즐기는 소고기의 탐식은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소 한마리에서 백가지 맛을 찾아낸 민족은 우리 민족뿐이다.


소 한마리에서 120가지의 부위를 찾아 낸 민족은 우리 민족뿐이다.


그런 우리 민족이 식민 지배자의 가르침으로 육식을 즐겼다는 주장을 정설로 믿고 있는 건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몽골의 간섭기 이후 우리민족이 육식을 즐겼다는 설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쓰여진 왜곡된 역사다.(난 그렇게 주장한다.) 


이 왜곡된 역사를 먼저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맥적과 불고기를 연결 시킬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종식하고 더 다양한 우리 민족의 음식사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민족이 몽골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겼다는 주장은 1978년 고 이성우 교수가 처음 주장한 걸로 알고 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니 그 이전 누가 주장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서긍의 고려도경의 도재편을 근거로 이야기 하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은 1123년에 쓰여진 책이다.


백정의 역사를 살펴 보면 적어도 993년경부터 포로가 된 달단족이 한반도에 살았다. 1123년에 고려땅에 백정이 있었다.   도축 기술을 보유한 달단족이 한반도에서 산 100여년동안 고기 잡는 일을 안하고 살았을까?






양성지는 “달단족은 500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고 했다.


993년, 거란의 1차 고려 침략 시기다.


양성지는, 이때 이 민족이 거란군의 길 안내(향도)를 맡았다고 했다. 일부는 한반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출처]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달단족의 쇠고기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는 여전히 수준 이하였다.  



100여 년 뒤인 1123년(고려 인종 1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가 형편없다.


돼지를 불속에 던져서 그슬어 도축한다. 냄새가 심해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선화봉사고려도경).


여전히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달단족의 쇠고기





고려 도경속 도재(도축)편에서 살아 있는 돼지를 불속에 던져서 냄새가 심해서 먹을 수 없다.는 구절을 가지고 고려사람들이 고기를 다룰지 몰랐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돼지에 스트레스를 주어서 잡으면 고기가 연해져서 맛있을 수 있었다.  중국 무덤의 벽화에서도 개와 돼지의 도축 그림이 갔다.


뭉둥이로 잡는다. 고대 로마에서의 돼지 도축법도 돼지에게 비참하게 잡는다.


아마도 DFD (이상육)를 만들어서 먹었던 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은 돼지가 DFD 이상육이 되는데 이 이상육이 보존성이 안 좋지만 도축후 바로 잡아 먹는 고기로는 더 맛있을 수도 있다. 



돼지고기에서 냄새가 난 건 사료나 비거세로 인한 웅취였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어떤 음식학자, 음식사학자도 도축법에 대한 연구를 해 본 사람은 없을거다.


아니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도축장 근처도 안 가봤을거다.



어설픈 나의 가설이 아니라 


고 이성우 교수는 1950년 일본으로 가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 와서 교수가 되신 분인 것 같다.


1950년 이전에 일본인들이 고려도경에 대한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하는 걸 찾아 보면 된다.


난 우리민족이 몽골 간섭기에 소고기가 고려로 시집온 몽골의 공주들과 그들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즐겼고(우리민족은 농사에 소를 이용했기 때문에 소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소는 고기를 먹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 였는데 몽골은 농사에 소를 이용하지 않으니 소고기를 먹는 것에 거침이 없었을 거다. 몽골인들이 좋아하던 양고기의 수급이 한반도에서 쉽지 않았으니 대체육으로 소고기 섭취량도 많았을거다.) 이런 소고기 요리와 맛에 고려의 권력층이 빠졌서 조선 왕조 500년 그리고 지금까지 소고기를 즐겼다고 생각한다. ( 우육식과 육식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고이성우교수는 몽골의 간섭이후 우육식을 즐겼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의 육식 민족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소고기 세계사를 연구해 보면 소고기를 서구 특히 영국인들이  탐식한 역사가 겨우 산업혁명 이후 부터 다.


우리민족이 소고기를 탐식한 건 1300년 중후반 부터 였으니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소고기 탐식의 역사가 긴 민족이다. 


이 주장은 아직은 가설일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연구해서 입증해 볼 생각이다. 


소고기 탐식의 역사가 가장 길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우리 한우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라는 가설도 입증이 된다.


우리 한우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화우뿐 아니라 중국의 산둥우에 대한 연구도 같이 해야 한다.


동아시아 소고기들이 맛있는 이유 


유럽은 낙농과 노동력을 확보를 위해 소를 키웠는데 


동아시아는 노동력을 이용한 건 유럽과 같은데 낙농이 발달하기 않아 송아지들이 우유를 풍부하게 먹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는 경축 농업이 발달해서 사료작물이 풍부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아마 유럽도 4윤작법이 발달하기 전에는 경축농업이었을거니 더 연구해 봐야겠다. 



음식사든 식육 문화사든, 정치사든 생활사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거다.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역사를 연구하면 오늘을 사는 자신들의 시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특히 우리처럼 식민지배를 받았던 민족은 더욱더 역사의식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왜곡된 역사의 흔적을 바로 잡는 시각교정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많은 식민 사관을 가진 사람들 아마 자기들이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늘 이점에 주의한다. 



 




  


https://hankookilbo.com/News/Read/201607171926227913





        %22https%3A%2F%2Fnewsimg.hankookilbo.com%2Fcms%2Farticlerelease%2F2016%2F07%2F17%2F201607171926227913_1.jpg%3Ft%3D20210123110642%22&type=ff500_300"        불고기는 '고구려 맥적'에서 이어져 내려온 음식? 근거 없다!

한식의 잘못된 뿌리 찾기

hankookilbo.com




한국 자존심 불고기는 우리 것 아니다? : 주간동아 (donga.com)



맥적(貊炙)의 요리법과 연원


The Origin of Maekjeok(貊炙) and Its Recipe


선사와 고대


2013, vol., no.38, pp. 315-338 (24 pages)


UCI : G704-001749.2013..38.010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역사학


박유미 /Yumi Park 1


1인하대학교



초록  




맥적(貊炙)은 최남선의 연구 이래로 우리 민족의 특징적인 육류음식문화 기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의 연구에서 맥적을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가 아니라고 보거나 또는 우리 민족의 문화라고 볼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여 맥적의 종족적 연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맥적은 漢代의 기록인『釋名』이나 위진시대의 문헌인『搜神記』등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양념을 한 통구이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육류를 잘게 잘라 나무 막대에 꿰어 굽는 중국식 적(炙)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맥적에 대해 기록한 문헌 자료에서 맥적의 연원을 호맥(胡貊), 적(翟/狄)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였으나 이들은 종족의 명칭이라기보다 한족(漢族)이 아닌 종족, 즉 이종족의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맥적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음식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식명은 일반적으로 음식에 관한 연원이나 정보 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맥적은 맥족 계열의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맥족과 관련하여 그 기원이나 지리적 위치 문제 등으로 여러 해석을 내릴 수 있으나 맥족 계열의 유력한 종족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맥적은 통구이 형태의 요리법에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맥적의 재료로 여러 가축이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주로 돼지나 양이 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역축(役畜)으로서 사용되는 말이나 소보다는 양이나 돼지, 특히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되는 돼지가 맥적의 재료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맥족 계열의 고구려인이 거주하는 만주지역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지역적 특징이나 민족의 생활습속으로 볼 때도 양보다는 돼지가 맥적의 주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불고기 역사적 계보 정리한 이규진 경남대 교수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정의


최남선(崔南善)이 저술·간행한 우리나라 역사개설서.


개설


1943년 삼중당서점에서 발행되었다. A5판, 활자본.


1951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육당전집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육당최남선전집』 전15권을 간행할 때 제1권 통사편(通史篇)에 『조선역사강화』와 함께 수록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저자는 1930년『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를 발표하기까지는 주로 우리나라 상고사와 단군연구에 주력했는데, 1928년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이 된 뒤에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개설서를 썼다.


이 책은 『조선역사강화』를 수정하고 증보해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다. 장절(章節)과 분량이 전자보다 두 배 정도 증가되었고, 기술된 내용에 전문성을 띤 것도 있다. 책의 성격과 저술동기는 저자가 책머리에 간단히 적은 서문에 나타나 있다.


“사회가 있으면 문화가 있고, 문화는 통서(統序)를 좇아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에 관한 사적(史的) 지식이 언제 누구에게든지 필요한 까닭이 되는 것이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오늘에 이르러 체계를 세우는 일과 자료수집에 큰 변모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체재와 내용을 시대에 알맞게 다듬으면서, 주로 문화사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서지적 사항


체재는 앞서 간행된 『조선역사강화』와 같이 조선의 시작에서 후삼국까지의 상고편과, 고려시대사에 해당하는 중고편, 조선 전·후기의 근세편과, 대원군 집정 이후 융희시대와 간도문제까지의 최근편 등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100장에 매장마다 세 개의 항목을 둔 300항목의 절을 설정하였다.


『조선역사강화』와 『고사통』의 장절의 수를 비교해보면, 그가 대동아전쟁의 시대를 의식해 체재와 내용을 어떻게 조정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상고시대에 대해 전자는 10장 30절인 데 비해 후자는 20장 60절이다. 중고시대는 전자가 9장 27절인 데 비해 후자는 28장 84절이다.


근세는 전자가 17장 51절인 데 비해 후자는 34장 102절, 최근은 전자가 14장 42절인 데 비해 후자는 18장 54절로 구성되어 있다. 상고편과 근세편은 2배로 늘렸고, 중고편은 3배 이상으로 늘렸다. 그러나 최근편은 원래의 14장에서 4개장을 늘린 정도이다.


여기서, 그가 시국을 의식하면서 역사서술을 조정한 시기가 민족항일기에 해당하는 최근세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결국, 저자가 민족항일기 말기의 극심한 탄압으로 당시의 민족문제와 가장 관련이 깊었던 최근세사 집필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정치와 민족문제의 서술에 제약을 받았던 것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역사기술을 보완하려 한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 『고사통』의 최근편에서는 『조선역사강화』의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개혁운동’으로,‘민간의 신운동’을 ‘문화운동’으로 바꾸었다.


또 ‘민간의 신운동’에 있던 항목 ‘국채보상운동’을 빼고 대신 ‘문학과 종교’를 넣었다. 그 밖에 문화와 관련된 4개의 장(신풍조·신시설·광무연간의 신문물·재판제도)을 신설해 일본의 조선침략 이후의 문화적 개선을 소개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조선역사강화』에서는 중고편의 고려시대에 관한 서술이 주로 정치사와 국제관계에 치중되어 있고 고려 말 왜구를 ‘왜구(倭寇)’라고 지칭하고 있음에 비해서, 『고사통』에서는 그 분량이 3배 이상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주로 문화에 관련된 것이며, ‘왜구’라는 말 대신 ‘해구(海寇)’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사통』은, 첫째 1930년『동아일보』에 연재된 「조선역사강화」를 대본으로 하고 증보해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며, 둘째 그 내용도 정치 및 국제관계의 것은 대부분 전자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고, 간혹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것은 그들의 침략을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쪽으로 수정했으며, 셋째 전자에 비해 2배 정도 증보된 부분은 대부분 문화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집필 당시 저자를 제약한 일본의 탄압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저자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사통 [故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개설


전40권. 정식명칭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인데,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부르고 있다.


책의 명칭에서 보듯이, 1123년 휘종(徽宗)의 명을 받고 사절로 고려에 와서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기 때문에 ‘도경’이라 칭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서긍은 개성에 한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그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지었다.


책은 모두 28문(門)으로 나누었고, 다시 300여 항으로 세분하였다.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글로써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서긍은 돌아가, 곧 이 책을 만들어 휘종에게 바치고 그 부본을 집안에 두었다. 휘종은 책을 보고 크게 기뻐해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리고,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하였다.


서지적 사항


1126년(인종 4)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 : 汴京)을 함락시킬 때, 휘종에게 바친 정본이 없어졌다. 1167년(의종 21) 서긍의 조카 천(蕆)이 서긍의 집에 있던 부본에 의거해서 징강군(澂江郡)에서 간각(刊刻)하였다.


그 부본에는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이 없는 도경이 되고 말았다. 이 간본은 간행의 연대·장소에 따라 ‘건도각본(乾道刻本)’ 또는 ‘징강본(澂江本)’이라고도 한다. 고려 인종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 때 포정박(鮑廷博)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이 책을 수록·간행하면서 비롯되었다.


포정박은 발문에서 ‘건도(建都) 3년에 간행된 송판본과 간행 연대 미상의 고려본이 있으나 볼 수가 없고, 세상에 유전하는 것은 명나라 말기의 정휴중(鄭休仲)의 중간본(重刊本 : 鄭本)뿐이다.


이 정본(鄭本)은 탈자가 수천자에 달하고, 또 착간(錯簡)으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 간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포정박은 자기 소장의 사본과 정본을 참합(參合),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부족재본도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는 발문에서 송판본의 출현을 기다려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말로써 아쉬움을 표하였다.


1910년대 초 일본인들의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활인(活印)하였고, 1932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조선학총서(朝鮮學叢書)』의 하나로서 활인하였는데, 역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또한 건도 3년에 간행된 송판본 한 질을 소장하고 있던 중국 북경(北京)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1931년『천록임랑총서(天祿琳琅叢書)』 제1집의 하나로서 영인하였다.


이것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의 합불연경도서관(哈佛燕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에서 그것을 다시 영인, 널리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송나라 사람으로서 고려에 관한 기사를 남긴 것으로는 오식(吳栻)의 『계림기(鷄林記)』(20권), 왕운(王雲)의 『계림지(鷄林志)』(30권),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3권)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완전히 없어졌거나 겨우 그 일부분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어서 『고려도경』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다른 고려사 관계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 인종 때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회가 중국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으며, 또 어떻게 중국과 비교되고 특색지어졌는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자료의 이용에는 반드시 엄밀한 검토 및 비판과 취사선택이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도경 [高麗圖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들은 ‘달단족(韃靼族)’이다. 달단은 ‘타타르(TATAR)’다.


뜻도 재미있다. ‘단(靼)’은 ‘부드러운 가죽’이다.


달단은 고기, 가죽 등을 잘 만지는, 북방의 수렵, 기마 민족이다.


중국이나 한반도 모두 이들의 침략, 약탈로 속을 썩인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달단족은, 농경보다는 수렵이 친근하다. 주식도 고기다.


우리 민족과도 관련이 깊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달단족이 전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한다.



“백정은 화척 혹은 재인, 달단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 산 지 이미 500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민족입니다.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모여 살면서 소를 도살하거나 동냥질, 도둑질을 합니다.”(조선왕조실록)



‘달단’은 터키 북쪽, 중앙아시아의 타타르족과 뿌리가 같다.


역시 유목 민족으로 고기를 잘 만진다.


서양의 ‘타타르 스테이크’는 우리의 육회와 닮은 면이 있다.



고려, 조선 조정이 달단족을 천시한 것은


그들이 농경의 도구인 소를 도축하는 일로 생계를 삼았기 때문이다.


소의 도축은 식량 생산 감소로 연결된다. 농경국가로서는 소 도축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민족은 평소 버들고리(柳器)를 짜거나 밀도살로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소를 훔치거나 동냥질,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조 13년(1467년) 양성지(대사헌)의 거듭되는 상소다.


“예전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양민들도 도축합니다.


예전에는 잔치 준비를 위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팔기 위하여 소를 잡고,


예전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잡았으나, 지금은 소를 사서 잡습니다.”(조선왕조실록)



이 민족의 소 밀도살이 조선 양민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잔치 등 대소사에 쓰던 쇠고기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쇠고기 판매도 버젓이 이루어진다.


양성지는 소 밀도살이 농경국가 조선에 치명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막는다.



양성지는 “달단족은 500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고 했다.


993년, 거란의 1차 고려 침략 시기다.


양성지는, 이때 이 민족이 거란군의 길 안내(향도)를 맡았다고 했다. 일부는 한반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10세기 후반 이 민족이 고려에 왔지만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는 여전히 수준 이하였다.



100여 년 뒤인 1123년(고려 인종 1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가 형편없다.


돼지를 불속에 던져서 그슬어 도축한다. 냄새가 심해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선화봉사고려도경).


여전히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말선초, 소 밀도살 및 고기 식용은 확대되고 사회적 문제가 된다. 중심에 달단족이 있다.


‘고려도경’에서 서툴다고 했던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이 민족 덕분에 급속히 발전한 것이다.


13, 14세기에는 몽골이 한반도를 침략, 지배한다. 달단족은 몽골의 한 부족이다.


몽골의 원나라 멸망 후 더 많은 수의 달단족이 한반도에 남는다.



태종 6년(1406년) 4월의 왕조실록에는


‘달단 화척에게 소와 말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는 문구가 나타난다.


달단족의 소 밀도살이 상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 밀도살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태종 11년(1411년)에는 신백정(新白丁)을 조사 색출해 도성으로부터 3사(舍·1사는 30리) 밖으로 내쫓는다.


세종 7년(1425년)에는 도성 서쪽 무악산 아래의 신백정을 도성 밖으로 내쫓는다.


세종 29년(1447년) 3월의 기록에는 ‘농사짓는 소를 달단 화척에게 팔기만 해도 재산 몰수, 수군 편입,


소를 훔쳐서 도살하면 장 100대에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재산 몰수, 수군에 편입시킨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한반도의 오래된 고기 문화로 ‘맥적(貊炙)’을 든다.


맥적은 ‘맥족(貊族)의 구운 고기’다. 맥족은 북방의 기마, 수렵 민족이다.


맥적이 어떤 것인지 뚜렷하게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달단 화척’은 조선후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백정’이 나타난다.


달단족은 서서히 우리 민족으로 편입되었다.


달단족은 한반도에 고기 문화를 전하거나 발전시킨 이들이다.


‘소 잡는 도적(宰牛賊·재우적)’은 ‘거골장(去骨匠)’으로 바뀐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맥적이 아니라 ‘밀도살을 일삼던 달단 화척’에서 찾아야 한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출처]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달단족의 쇠고기|작성자 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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