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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 마수리 Apr 30. 2017

도시, 역사를 말하다

프라하, 슈투라스부르(크), 쾨니히스베르크, 단치히

카프카는 어느 나라 사람이지? 

유대인으로 체코 태생. 그런데 왜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글을 썼지? 


슈트라스부르랑 슈트라스부르크랑 다른 거야? 한 끗 차이인데?


칸트는 독일 철학자인데 왜 독일에는 그의 고향이 없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왜 폴란드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을까?


다음의 네 도시가 이유를 말해준다.




1> 카프카(1883~1924)의 도시, 프라하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은 거칠 것이 없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보헤미아(현재의 체코)는 독일인(신성로마제국)의 이주와 정책을 장려했고 1300년경 프라하에는  독일인 거주 지역이 생겨났다. 그들은 프라하의 학문과 문화를 주도했고 부동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전신,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이 멸망하면서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일어나 19세기 중반부터는 독일어를 사용하던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바뀌기 시작한다. 독일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카프카는 이 시기에 태어났다. 

독일의 흔적을 지워가는 도시에서 카프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즉, 이중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사망한 해에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5퍼센트였고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카프카의 누이들을 포함,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고 1945년에는 체코 정부에 의해 남아있던 독일어 사용자들이 완전히 추방되었다. 이로써 독일어권 프라하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카프카의 소설 속에만 남게 된다.




2> 알자스-로렌 지방의 대표 도시, 슈트라스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도시로, 주민 대부분은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독일식 교육과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 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손에 넣었고 169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슈트라스부르크가 사실상 프랑스 소유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이렇게 스트라스부르가 되었다. 

알자스 주민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어 사용자인데 프랑스가 점령한 후 프랑스어를 강제로 가르쳐왔었고 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에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주민들은 다시 독일어를 되찾았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다.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오랫동안 한국 교과서에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상징하는 소설로 등장했었는데 이같은 역사적 맥락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리로 치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선생님이 마지막 일본어 수업을 아쉬워하며 '일본어 만세'를 외치는 소설인 것이다.


1차 대전 후에는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가 1940년에 재차 독일에 반환되었고 1944년에는  또다시 프랑스 땅이 되었다.

현재는 명백한 프랑스령으로 유럽연합 의회의 본거지이고 괴테가 경탄을 금치 못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3>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통일 독일제국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프로이센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도시이다. 그리고 칸트의 고향. 칸트는 1724년 태어나 1804년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평생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2차 대전 때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해 소련 영토(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만들었고, 프로이센을 떠올리는 건물과 유적을 파괴하고 도로명과 지명을 바꾸는 등 이 도시에 대한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하지만 칸트의 명성은 어쩔 수 없었는지 칸트가 다니고 교수로 있던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이 칼리닌그라드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5년에는 칸트대학으로 다시 태어났다.


1991년, 지역 주민들이 독일로 편입하려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려 했지만 독일이 1990년 통일 과정에서 쾨니히스베르크 등 옛 동프로이센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독일 정부가 거부했다.


칼라닌그라드 왼쪽에 단치히(그단스크, 그다인스크)가 있다.

  https://goo.gl/maps/ESFdzYih5jq




4> 귄터 그라스의 도시, 단치히(그단스크 혹은 그다인스크)


단치히는 <<양철북>>하면 떠오르는 작가 귄터 그라스가 태어났고  그의 '단치히 3부작'의 배경 도시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1788년 단치히 태생.


18세기 말, 프로이센으로 합병되었다가 1차 대전 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자유시로 인정받으면서 폴란드가 행정 통치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이 독일인인 단치히 의회에서 폴란드가 감독하는 것에 반발한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동유럽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고 결국, 히틀러가 단치히 탈환을 내세우며 폴란드를 기습적으로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2차 대전에 패한 독일은 1945년, 단치히를 다시 폴란드에 반환한다.

프로이센의 지배, 나치 독일의 잔혹함, 독일과 소련의 전투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 등 독일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폴란드 국민들은 1970년, '동방정책'(공산권과의 교류협력)을 추구하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구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고 이로써 독일과 폴란드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단치히(현재 폴란드 그단스크)는 1980년대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이 자유노조운동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서독으로 갈라진 독일이 빠르게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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