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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 마수리 Sep 09. 2017

내 나이 마흔 살에는(1)

유학의 꿈을 못 이룬 대신 캐나다 이민을 가게 됐어요.

20대까지, 인터뷰를 보거나 읽을 때 내 나이와 비교하는 버릇이 있었다. 또래면 부러워했고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도 저 나이 되면 그만한 성과쯤은 낼 수 있어'. 

당시에는, 30대에 일의 기반을 닦고 40대가 되면 대가가 되어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사십춘기'라는 암초를 만날 줄이야.




흔들리는 사십 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첫 번째 이야기는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사람이다.


이정아(46세, 컨설턴트, 남편, 1남 1녀)

남편은 직장을 몇 번 옮겼고 이직 이유는 언제나 똑같았다. 경영진의 비리와 불합리한 경영 구조. 회사 운영이라는 게 다 그런 건데 너무 민감한 거 아니냐며 핀잔을 줬지만  항상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나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우리 이민 갈까?"

한 번씩 이민 이야기를 꺼낸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장난으로 넘길 수 없는 묵직함이 있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남편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엇이 이 남자를 여기까지 몰고 왔을까? 나는 이민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얘들은? 그때부터 셀프 테스트를 해보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나는 소통이 안됐다. 두 마디 이상 대화가 이어진 적이 없었다.  생업인 차 농사로 늘 바쁘셨고 그분들에게는 자식들 안 굶기는 게 제1과제였다. 일만 하셨다.

학창 시절, 배드민턴 선수로 보성군 대표까지 지냈지만 운동 뒷바라지를 전혀 안 해주셨고 대학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꿈을 접었다. 한 번도 부모님한테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방관하셨다.

중1 딸은 이민을 적극 찬성한다. 주변에 짧게나마 해외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있다 보니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고 본인도 해외 생활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자주 비쳤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한 거 아니야? 아이가 더 큰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데. 자유분방한 애니 어차피 좁은 한국에서는 살기 힘들 거야. 넓은 세상에서 자기 뜻을 펼쳐보라고 하지 뭐."

아이의 뜻을 꺾고 싶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최대한 지지해주고 싶다. 부모가 걸림돌이 되어 못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주말부부 5년 차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는, 커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남편(아빠)의 부재를 크게 못 느꼈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같이 공유하는 정보와 추억에서 아빠라는 존재가 아이들 머리에서 서서히 배제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아빠를 무시하는 태도가 보이고 대화가 없다.  단답형 질문과 대답. 내가 부모님께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40대 후반이다. 직함이 주는 무게, 승진의 한계, 학벌의 한계, 영어 스트레스 그리고 남편의 단골 이직 사유인 경영진의 비도덕성. 결단이 필요했겠지. 회사에서 자리 지키기 위해 머리를 조아릴 것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자리인가? 그 와중에도 시부모님의 장남(남편) 찾는 전화는 수시로 울린다. 

10분 거리에 사시는 시부모님은 장남 의존도가 매우 높으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항상 장남을 대동하신다. 집안 대소사 상의부터 간단한 병원 진료까지. 그러니 주말에 집에 와도 쉬지를 못한다.  

오늘도 찾아뵙고 왔다. 남편은 이민 준비를 부쩍 서두른다.


애들과 남편 핑계를 대지만 나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중학생까지 운동선수로 지냈지만 외교관을 꿈꿨고 전공도 정치외교학이다. 결혼 전까지 계속 영어 환경에 노출되어있었다. 대학에서는 '타임'지 동아리 활동을 했고 주변에 해외 배낭여행 다녀오는 친구들의 긍정적인 변화도 지켜봤으며, 사회에서는 3년간 영어 강사도 했다. 

젊은 시절 못 이룬 유학의 꿈을 이민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는듯하다. 그때 만났던 원어민 강사들은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고 사물을 보는 관점이 명확했다. 우리 아이들도 토론 잘하고 설득력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본다.

평생 캐나다에 살지 중간에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40대는 도전할 수 있는 나이다. 만약 5-7년 후에 돌아온다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돌아온다면 해외취업 알선 서비스나 해외 부동산 중개업을 해볼까 한다.  

결심이 섰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낫다. 



마지막으로, 캐나다 이민 준비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 여러 에이전시를 통해 내 목적과 나이에 맞는 지역과 준비사항 등을 상담받았다.

퀘벡 주를 많이 추천받았는데 아시다시피 그곳은 불어가 공용이라 불어 점수가 필요하다. 영어 아이엘츠(IELTS) 점수도 없는데 불어라니,,,

현지 보육교사로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는데 한국에서도 현지에서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다. 결정적으로, 당장 교육비 입금부터 하라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노인요양보호사도 안내받았는데 현지 기관에서 교육받고 취업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 교육기관이 자녀 학비 보조가 안 되는 곳이었다.

토론토와 밴쿠버도 고려해봤지만 물가도 비싸고 영주권 얻기도 힘들다. 학교를 2년 다닌 후 취업해서 1년 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반면, 내가 가려는 매니토바주는 남편이 풀타임으로 6개월 근무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고 내가 칼리지에서 ESL 과정을 수강하면 아이들 학비가 무료다. 

나는 학생 비자, 남편은 워킹 비자, 아이들은 관광 비자로 들어가게 된다.

둘째, 비자 신청/신체검사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재검 통지를 받아서 살짝 걱정이 된다.

비자 신청 시, 통장(예금) 잔액 증명서를 제출하는데 요구하는 금액을 하루만 유지하면 된다. 예를 들어 2천만 원을 요구한다면 그 금액을 입금한 후 은행에서 영문으로 된 잔액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음 날 필요하면 얼마든지 돈을 찾아 쓸 수 있다. 잔액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발급받는 날 하루 동안은 입출금이 전면 중지된다. 

셋째, 항공권 예약

넷째, 집 구하기

150만 원을 주면 현지 중개인을 통해 살 집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직접 알아볼지 맡길지 고민이다.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을 할지도 몰라.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빨리 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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