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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숙 Sep 17. 2023

숙소 마을에서 갈 데가 없어 동물원으로

2023년 4월 16일

한달살이 숙소가 있는 데친 시가 체코 북쪽 변방지역이라는 건 이미 말했을 거다. 여기 올 때는 독일과의 접경지대라 들어 확 끌렸는데(물론 독일로 넘어가기 좋은 점은 있다) 마을 자체는 참 보잘것이 없다. 동네 자체가 예쁘지 않다. 독일 쪽으로 한두 시간 열차 타고 넘어가서 아무 역이나 내려 들어가면 너무나 예쁜 마을이 많다. 마을마다 각자의 예쁨을 간직하고 앉았는데 며칠을 돌아다녀도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이곳 데친은 뭐랄까. 너무나 투박하다. 아기자기한 맛이 제로다. 건물은 나름 묵직한 맛도 있고 거리도 넓어 다니기는 편한데 생기 없달까 물기가 없달까. 좋게 말해 남성적이다. 변방도시에서 점잖게 나이 든 아저씨 같은 도시랄까. 

무엇보다 가게는 다 문이 닫혔고 어디 들어가 앉아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다. 문열린 데가 어쩌다 눈에 띄어 들어가면 어두침침한 데다 우중충하고 술잔 앞에 놓고 앉은 남자들만 앉아있다. 말했듯 아기자기한 맛 제로다.

어쩌겠나. 그래도 한달살이를 왔으니 갈 수 있는 델 찾아서 다녀봐야지. 눈에 불을 켜고 어디 주변에 갈 데 없나, 찾아보자고 구글앱을 켰다. Decin Zoo가 눈에 띄었다. 경로와 시작 표시 클릭, 야무진 남자의 목소리가 안내를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이리저리 길을 꺾어가며 20분쯤 걸으니 경사가 엄청 심한 비탈이 나타났다. 무거운 파카를 입어놓으니 일기예보상 11도 날씨인데 등에 땀이 배어났다. 그래도 데친 숙소 근처에서 볼 수 없었던 예쁜 집과 언덕길을 구경하는 맛이 났다. 오- 예쁘네 예쁘네 하면서 올랐다.

여러 가지로 정말 매력적인 체코지만 날씨는 참 지랄맞다. 동유럽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금세 추웠다 금세 더웠다, 비가 퍼부었다 쨍하고 갰다 제 맘대로다. 날씨 하는 짓이 예측불허하고 감정 조절 안 되는 사람 같다. 이런 말로 투덜거리며 스트레스를 풀라치면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거 아니냐, 인생이 원래 예측불허한 거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어쩌고 하며 초긍정적 토를 다는 사람 꼭 있다. 훌륭하지만 피곤한 타입이다. 

이마에 땀을 얹고 매표실로 가서 표지판에 적힌 대로 adult 100코루나를 동전으로 냈더니 매표소 아줌마가 고개를 50을 더 달라고 계산기에 찍어 보여준다. 원 헌드레드 코루나잖아! 고개를 저었더니 아줌마가 나보다 더 세게 고개를 젓는다. 나도 더 세게 고개를 저을까 하다가 순순히 50코루나를 건넸다. 표지판을 다시 봐도 100코루나다. 뭔가 깊은 음모가… 있을 리는 없고 표값 수정을 안 했겠지. 

오래전부터 동물원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기회가 없었는데 체코에 와서 가게 되네. 

매표소 직원이 준 지도를 들고 제일 보고 싶어했던 곰 우리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곰 우리가 있었다. 곰이야 다들 호감을 갖고 대하는 동물이니 동물원에 들어선 사람들을 환영하듯 입구 가까운 데 설치해놓은 듯했다.

곰 모양을 한 나무조각이 서있는 곳에 다다르니 우리 안에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곰이 정말 곰처럼, 곰답게 엎드려 자신의 무게로 바위를 뭉개고 있었다. 듬직한 다리 하나를 다른 바위에 척 걸친 채 약간 높직한 바위를 베개 삼아 턱을 얹어두고 있었다. 우리 앞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니 호기심 충만한 동양 여자의 뜨거운 눈길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쓰라린 시간을 오래 견딘, 덤덤하고 차갑고 무거운 곰의 눈빛을 나는 정면으로 받았다. 물론 나는 마음을 다해 곰에게 내 말을 전했다. 인류를 대표하여 철망 우리를 경계로 안과 밖에 서있게 된 현실에 대해 미안하다고 가볍게 사과하고, 모종의 우리에 갇힌 내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위로를 보냈다.

곰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여우를 보러 갔는데 얘들이 다 땅구멍을 파고 들어앉았는지 5분을 기다렸는데 코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는 개만 한 새끼 한 마리와 낮잠에 취한 어미가 서로 떨어진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혹시 저거 진짜 호랑이 아니고 돌을 다듬어 모양을 만들어놓은 거 아닌가 의심이 들 만큼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새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세상에 저렇게까지 화려한 꼬리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싶게 근사한 공작을 보고 나자 다른 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몸통이 까맣고 탱크처럼 단단한 데다 성질머리가 사납고 날갯짓이 대단히 폭력적인 새가 내 마음을 빼앗았다. 크기는 우리나라 토종 수탉만 한데 단단하기로는 동물원의 그 까망새가 훨씬 윗길이었다. 

사실 곰을 보는 것으로 동물원을 찾은 감동은 다 채웠던 터라 지도에 그려진 길을 죽 따라 걷고는 매표소 쪽으로 도로 나왔다. 출구가 따로 있는지 나가는 문이 없어 출입 차단기를 쳐놓은 곳 밑으로 허리를 잔뜩 수그려 기다시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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