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좁다더니
이번 정신과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일단 집에서 가까울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정신과를 다닌 지 5년이 되어서 어느 정도 틀이 갖춰진 환자이기에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축에 든다. 늘 먹는 약도 거의 같은 수준이고 특별히 대단한 상담을 의사가 해 주는 것도 아니란 걸 알기에 약만 제 때 처방받을 수 있으면 만족이기 때문이다. 보통 초기에는 일주일, 이 주일씩 의사를 만나야 하는데 나처럼 안정화 된? 환자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한 달치 약을 타 오곤 한다. 그래도 한 달이 금방 가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전에는 잘 맞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면 그래도 한 주간 있었던 일을 물어보시곤 그 일에 대한 짧은 코멘트라고 남겨주셔서 병원 가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지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정신과를 가면 지난번 약은 어땠는지, 어떤 부작용이나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그럼 이번에도 같은 약을 그대로 처방해 주겠노라 혹은 잠잘 때 약을 좀 줄여주겠노라 이러고는 진료 끝이라 진료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하다못해 내과나 이비인후과를 가도 어디가 아프세요, 어떻게 아프세요, 지난번 약이 효과가 없는 듯 하니 이번엔 조금 다른 약을 써보죠 하는데 정신과는 내가 어디가 아픈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진료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 “어떻게 지내셨어요?”라고 묻지만 의사는 바쁘게 모니터를 보고 타자를 치고 나는 혼자 허공에 말하다 결론은 “약은 지난번과 같이 처방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난 방을 나온다.
그래서 이번엔 집에서도 걸어갈 수 있고 검색해서 보니 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병원을 정해 바로 예약을 했다. 후기에 자주 언급되었던 데스크 간호사들이 불친절하다는 말대로 전화예약부터 아주 기본이 없는 말투여서 거슬렸지만 일단 가보자 했다.
월요일 오전 10시. 새로 지은 멀끔한 건물 2층이었다. 대기실 의자는 꽉 차서 앉을 곳이 없어서 날 놀라게 했다. 데스크에 접수를 하려고 하니 문제의 간호사 두 명이 역시나 불친절한 태도로 접수를 받았다. 왜 이런 개념이 없고 어린애들을 쓰는 걸까. 한숨이 나왔다. 심지어 내가 지난 병원에서 받아 온 소견서와 여러 서류를 건네자 보고는 둘이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한 마디 하려다 참자 잠깐보고 말 인간들이다 생각했다.
또 똑같은 설문을 작성해야 했다. 하지만 난 프로 환자니까 기다렸다는 듯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터치 패드의 질문에도 척척척 체크하고 좀 기다리니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호명이 들렸다. 새로 지어진 건물에 새로 한 인테리어. 인상 깊었던 점은 진료실의 모든 문이 방화문에 안전 잠금장치까지 다 되어있는 점이었다. 아마도 몇 년 전 진료받던 정신과 병원에서 환자의 흉기난동으로 돌아가셨던 의사 선생님 사건에 큰 충격을 받으신 듯싶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내게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난 사실 정신과 의사들을 관찰하는 걸 재미있어한다. 그들이 내가 무슨 약을 먹고 어떤 일로 증상이 시작되고 묻기 위해 혹은 설문 조사 결과를 보기 위해 잠시 텀이 빌 때 난 진료실의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책장에는 무슨 책이 있는지, 어떤 액세서리가 걸려 있는지, 그러면서 내 나름대로 그 의사에 대한 추리를 해 본다. 이번 의사의 책장에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권과 정의는 무엇인가란 책이 거꾸로 꽂혀 있었고 이기적인 유전자 등 몇 권 없었다. 책장 하단에는 납작한 검은 가죽가방이 성의 없이 올려져 있었다.
어찌 보면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에 하루하루 밀어닥치는 환자를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반쯤 혼이 나가 있는 것도 같았다. 의사 선생님의 말투는 매우 친절하셨는데 가만 보다 보니 자꾸 낯이 익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혹시 전에 수원에 s정신과 계시지 않았나요? 거기 3번 방에 계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수원 쪽에서 다니던 정신과에서 마지막에 한두 번 상담했던 선생님이랑 너무 닮아서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분이 맞았다! 난 너무 신기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2년 전 수원에서 본 의사를 지금 이때 인천에서 본 단 말인가. 삶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덩어리다. 아무튼 개원을 축하드린다 하고 이런저런 이야길 하고 나왔다.
진료실을 나오니 대기실엔 앉을 곳이 없어 약이 나올 때까지 난 복도를 서성거려야 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말라가는 화분의 식물들. 난 화분을 건강히 키우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물을 주지 않아 저렇게 말라가는 식물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최소한의 자기 업장을 돌보지 않는 기분이랄까.
삼 주 치 약을 받고 병원을 나오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느새 비는 싸라기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겉 옷을 움켜쥐고 집으로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나도 모를 한숨이 나왔다. 이번 병원을 또 얼마동안 다니게 될까. 도대체 약은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걸까. 끊을 수는 있는 걸까. 난 언제까지 이렇게 듣는 이가 관심 없는 내 고통에 대해 말을 해야 할 까. 이상하게 병원을 다녀오면 더 가슴이 답답해지고 두려워진다.
신기한 인연에 반갑기도 하면서도 살아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모른다는 사실이 날 무섭게도 한다. 그렇게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죽어서 이 세상에 없고 만날까 두려운 이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살아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잘해야지 원수 지고 살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지치고 참 잔인한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도 따뜻한 집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우면 세상 다 가진 듯 행복도 하니 난 역시 너무 생각이 많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