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흐드러지다. 누가 만든 말인진 모르겠으나 정말 딱 맞는 표현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이름 모를 나무들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시기이다. 난 목련나무야. 난 벚꽃나무였지. 난 개나리. 사랑받고 싶어. 예쁨 받고 싶어. 화려하게 치장한 식물들의 사교계. 그 속을 걸어가며 황홀할 정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늘의 파란빛과 눈이 부시도록 형광빛의 벚꽃잎들에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김민희가 죽으려고 달려가서 벚꽃나무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을 매달 때 그런 그녀를 받잡고 외치던 김태리. 벚꽃으로 가득한 벚꽃나무의 나무대는 의외로 굉장히 굵고 강한 힘으로 검은 빛깔로 뻗어있다. 그런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나도 몇 번이나 저기에 줄을 걸고 죽을 수 있다면 벚꽃과 함께 흔들리며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게 오늘처럼 진흙탕 같다고 생각될 때 시궁창에서 기어 다니는 기분일 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더 나아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자신을 자위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정말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엔 같이 손을 잡고 웃으며 그 담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달려 나간 두 여자들처럼, 그렇게 날 잡고 있던 존재에게 빅엿을 날리고 더 넓고 큰 세상으로 가슴 벅찬 설렘과 기대로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으로 그렇게 다른 세상으로 달려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전자로도 후자로도 끝날 수 있다. 아직 이 순간에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직 엔딩 자막은 올라오지 않았다.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라도 선택하고 싶다. 나쁘지 않을 엔딩을. 계속해서 나를 위해 좋은 선택이 쌓인 엔딩을. 그러다 보면 나를 위한 최상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