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 담은 짐승이 그렇지 뭐…
요즘 대기업의 횡포에 나의 모든 그나마 남아있던 감성까지 말라붙어 바스러지고 있다. 글을 쓰고 싶은데 곱디 고운-전에도 그렇지 못하긴 했지만-글이 나오질 않는다. 이래 봤자 내 손해고 내 건강만 해친다 하며 스스로를 타일러도 보고 혼내보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다스려봐도 좁디좁은 내 마음의 한계만 볼뿐이다.
어젯밤에도 심란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에 갑자기 아파트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꽤 긴 시간 동안 울리자 불안한 마음에 나가보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복도식인데 새벽 두 시라 그런지 옆 옆 옆집에 사는 신혼부부네만 눈을 비비며 나와 있었다. 지난번에도 오작동으로 그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꽤 길게 울려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신혼부부도 자다 일어나서 정신이 없는데 일층에 내려가 봐야 하는 건지 나와 잠시 말을 나누다 경보기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세 번 반복. 오작동인가? 그러나 혹시라도 화재면? 우리 동은 복도식에 제일 작은 평형이라 주로 신혼부부나 일인 가구 혹은 노인분들이 사는데 한 동에 세대수가 많은 편이다.
결국 119에 전화를 했다. 혹시라도 우리 아파트로 화재가 접수된 것이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결론은 소방차가 출동하고 경찰이 오고 신고자의 신원 따윈 중요치 않게 난 불려 나가고… 장난전화한 것도 아닌데 이 소동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몹시 부끄러웠다. 결국 기계 오작동인 걸로… 언젠가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진짜 불이 나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꼼짝도 안 할 거야라고 나를 위로하며 잠자리에 들었지만 알 수 없는 민망함과 창피함에 한 시간마다 깨고 말았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많이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 대기업의 횡포도 횡포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장 나를 실망시킨 건 내 주변의 사. 람. 들.이다. 뭐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애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 나의 잘못이지만 사람을 만나면 이익이나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방침? 이기에 나는 그냥 그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이 내게 뭘 해줘서 나에게 이런 점이 유익이 되어서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과의 대화, 같이 보내는 시간, 공유하는 서로의 기억과 생활 따위를 나누는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옆의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왔는데 이번에 내가 느낀 것은 그렇게 상대를 대하니 나는 어느새 국민대호구가 되어 있었다. 시공자들은 나를 돈 주는 호구로, 같은 일을 하는 다른 가게 사장인 지인들은 나를 감정쓰레기통호구로, 나는 어느새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난 그들을 동료이자 때론 나이를 넘은 친구로, 때론 오빠들처럼 그렇게 존중하고 대해줬는데 그 사람들은 나를 일을 따서 일당을 벌게 해 주고 밥과 술을 맘대로 먹게 해 주고 일도 적당히 해주고 그래도 잔소리도 안 하는 호구로 보고 있었다. 내가 대기업의 횡포에 너무 힘들어 그만둬야겠다고 말할 때도 그들은 전부 그래도 경기가 어려우니 지금은 참아보라고 하면서 일의 강도나 요구하는 일 퀄리티에 대해서는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매니저들은 매니저들대로 내 시공자들을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다른 시공팀을 쓰는 게 어떠냐고 하고 나는 조금만 더 적응해서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매니저들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만 중간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욕이나 먹고 모든 문제의 책임은 나에게 오고 그들은 돈만 챙겨가면 그만이고. 나는 시공자들에게 돈을 절대 이틀 넘게 늦게 주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당일 입금해 주고 늦으면 그다음 날이다. 그러다 보니 더 호구가 된 것일까. 돈으로 그들의 목줄을 쥐고 흔들었어야 하나.
어떤 사장은 아침에 목수들을 모아놓고 “이 따위로 일하면서 돈 받아갈 거야?!” 이러면서 미친 듯이 화를 낸다는데 그러면 다들 확실히 마감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렇게 대우해야 하는 걸까. 자꾸 생각하여도 싶지 않은데 그 말이 떠오른다. ‘이러니까 노가다 소리를 듣지…’ 그들은 일당이라 책임감이 없다. 그래도 난 믿었다. 일이 년을 같이 일한 사람들이고 내가 그들을 믿고 대우해 준 만큼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을 거라고. 그런데 일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그렇지…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도 없고 그런 내가 바보만 되는 게 당연한.
나를 용서 못하겠다. 사람들이 밉다. 내가 준 믿음과 마음을 저버린 그들을. 자기 밥 줄 앞에서 한 없이 가벼운 그들의 양심을. 미워하고 있는 나를 스스로 용서 못하겠다. 그들과 술을 먹고 농담 따 먹기를 하고 일이 너무 고되니까 일하는 시간 동안은 즐겁고 싶었던 나를 스스로 용서 못하겠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 받아준 나를. 나에게 화를 내고 징징대고 하소연을 한 시간 넘게 하고 서로를 공감하는 척했지만 결론은 늘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지라고 끝나는 대화를 늘 받아준 나를 용서 못 하겠다.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과연 내가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대기업 공사들이 끝나면 어딘가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