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de Feb 05. 2022

나의 이혼이야기.03

03.고백

 고3 여고생. 사실 닥쳐오는 수능보다 이성에 관심이 더 가는 시기. 복숭아 같은 볼들은 여리고 설레는 무언가를 찾아 꺄르르 웃음이 번지는 나이. 


 따스해지는 봄기운. 나른한 여유.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과외시간을 조금은 지난 시간. 계단을 통통통 올라오는 그의 날렵한 발소리, 그리고 익숙하고 반가운 그의 얼굴, 약간의 농담과 어려운 수학 문제들. 아쉬운 마음으로 이제 그를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느 때와 같은 과외 시간이 끝나고 나는 다음 과외 시간에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런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수업이 끝나고 문제집을 덮으면서 그 사람이 입을 뗐다.

 " 나 5월에 군대가, 과외를 계속하고 싶으면 내 친구를 소개해줄게."

 머리에 쨍하고 뭔가가 깨지는 듯한 충격이 왔다. 반복되던 하루하루가, 규칙적으로 그래도 이 사람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깨지는 소리였다. 순간 화가 나고 뭔지 모를 배신감이 몰려와서 군대 가기 전까지만 과외를 받고 다른 선생님을 소개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그날은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보면서 왠지 세상이 뿌옇게 되는 듯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문제집을 펴도 그 사람의 글씨가 아른거리고 집중하려고 해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낮은 침착한 톤의 저음. 잘 쓰지는 못하는 꼬부랑글씨. 그리고 함께 있을 때의 설렘과 들뜨는 마음. 그 당시 '태양은 없다'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었는데 영화에서 나온 이정재가 입었던 셔츠 같은 파란색 큰 꽃이 그려진 셔츠를 그가 사 와서 엄청 놀리면서 웃었던 기억.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매직을 하고는 찰랑거리는 머리를 자랑했던 기억. 작은 소소한 기억들이 나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만들었다.

 

심란함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니텔 - 모르시는 분들은 당시 나름 핫했던 카카오톡이라고 생각하자- 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로그인되어있는 게 아닌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그는 전날 밤새 당구를 치고 들어와 잠을 자다 이제 일어났다는 둥 난 이제 점심을 먹었다는 둥 서로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말을 하고 싶다. 좋아한다고. 내 과외선생님은 당신뿐이라고. 차일게 뻔하지만 어찌 됐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결국 저질렀다.


“선생님, 좋아해요.”


 정말 심장은 두근두근. 얼굴은 홍당무. 떨리는 손가락.

 답은 금방 왔지만 나에겐 꽤 긴 적막함으로 다가왔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응, 나도^^.”


  응? 이게 끝인가? 그리고 정말 인가? 하지만 난 듣고 싶었다. '나도 널 좋아해' 그 말을. 다시 한번 말했다.

 "저 선생님 좋아한다고요."

 "나도 너 좋아해."


 드디어 원하던 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짝사랑만 해오던 내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실패작인 나를. 이대로인 나를 좋아해 주다니. 처음으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행복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기적이 일어나다니. 정말 감히 내가 이렇게까지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홀함 속에 우리의 1일이 시작되었다.


 그의 입대일은 5월 31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 03화 나의 이혼이야기.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