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던 글감은 포기하고

by 꼬르따도

금요일은 금방 돌아옵니다.


아직 제가 다니는 회사는 일주일에 2회 까지는 재택 근무를 허용합니다. 저는 시니어 엔지니어라 눈치껏 일주일에 두 번 까지는 아니고, 한 달 기준으로 3회 또는 4회 재택 근무를 시행합니다. 보통 목요일에 재택 근무를 하는데, 재택 근무를 하루 라도 하는 주간엔 그렇지 않은 때보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재택근무를 하던 어제는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의 학부모 면담을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바로 3분 컷이라 근무를 하다가 잠깐 짬을 내 다녀왔습니다. 마침, 결막염에 걸려 행여나 눈꼽이 보이지나 않을까 우려되어 세수도 깨끗이 하고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녀왔습니다. 아내가 '잘 챙겨입고 가 대충 입고 가지 말고. 우리 집의 얼굴이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멀끔하게 가란 말이야!' 라는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 어머니가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내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제법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과 어린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서 면담을 하는데 마치 교무실에 끌려간 학생 마냥 입술이 마르고, 시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저는 갱년기 탓인지 요새 쉽게 얼굴이 빨개 집니다.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사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말은, 우리 딸아이가 본인 학교 생활을 스스로 잘하고 있고, 재미있다라고 선생님께 표현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앞에 나와서 하는 발표는 부끄러움이 많아 선생님이 시키면 마지 못해 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시켜도 나오지 않은 아이들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훌륭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얼굴이라도 더 빨개지면, 우리 딸 아이가 아빠 닮아 그런가보다 하는 편견이 생길까봐, 애써 웃으며 부러 호탕한 척 '하하하 그거 참 다행이네요' 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아내가 바빠서 대외적인 학부모 역할은 제가 다 하고 있는데, 아내는 저의 이런 노고를 알고 있을까요?


*


금요일입니다. 오늘은 퇴근 후,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작정한 날입니다. 하지만, 요 몇 달 간 밤에 요의로 인해 잠을 깨서 퇴근 후에 비뇨기과를 들렸습니다. 다음 주에 들릴까 하다가, 아내의 불호령에 오늘 병원 예약을 했습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비뇨기과의 검사는 꽤나 불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대략 5초에서 10초 사이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건강을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죠? 하면서 어린애 타이르듯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럼요, 라고 흔쾌히 대답했지만 이미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손가락이 내 항문으로 진입하여, 전립선을 자극해서 전립선액을 추출한다고 하더라구요. 먼저 피검사부터 하라는 말에 피를 뽑은 이후, 재빨리 전립선 검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네이버에서 검색을 했습니다. 이후에 전립선 검사는 얼마나 아파? 라는 질문을 쓰려다, 그까짓것 불쾌해 봤자지 하면서 검색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10분이 지났나,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전립선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손에 의료 장갑을 끼고서 의료 젤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10초가 지났습니다. (자세한 기술은 생략합니다.) 생각보다 불쾌하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그럴 듯한 계획이 있었는데, 오늘 쓰려던 글감이 있었는데, 그 불쾌한 기억이 머릿속을 헝클어서 원래 쓰려던 소재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제법 정돈된 마음으로 기승전결을 잡아야 했거든요. 지금처럼 헝클어진 마음가짐으로는 수미상관의 일관성 있고 논리적인 글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손이 가는데로 마구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이 글을 쓰는 곳은 판교 테크원 빌딩입니다. 이 빌딩엔 네이버도 있고, 포티투닷도 있고, 현대자동차도 입주해 있습니다. 증권사도 있고 병원도 있고 음식점도 있습니다. 이 건물에 제가 QR 인증 사옥 방문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추억이 새롭죠. 3층에 올라가 내가 도입한 결과물을 보려다가, 그냥 2층에 앉았습니다. 2층엔 문제의 비뇨기과가 입주해 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오복수산도 같은 층에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기분엔 카이센동이지 하며, 가끔 기분낼 때만 가던 오복수산에 들렸습니다. 카이센동은 2.3만원 정도하고 거기에 청하를 곁들이면 3만원입니다. 공깃밥, 장국, 김은 무한리필이니 부족하다면 눈치 보지 말고 추가 주문을 하시면 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전립선염에 술,담배는 쥐약이니 당분간 금주하라고 하셨는데 아직 치료가 본격적이지 않아서, 오늘은 청하 한 병을 마셨습니다. 실은 오늘부터 치료를 시작할까요 라고 의사 선생님이 물으셨는데, 아니오, 차주 월요일 결과가 나올 때부터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 답변의 근거에는 전립선 검사의 불쾌한 기억에 검사 이후 술 한 잔 해야지 하는 강한 의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그렇게 의욕이 있는 편은 아닌데, 진료 이후 소주 한 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마치 비린 음식을 먹고 나서 소독을 할 겸 소주를 한 잔 마시는 것과 비슷한 프로토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주 화요일엔 고객사와 미팅 이후 저녁 약속이 있는데 그 핑계로 수요일부터 항생제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전립선염의 주범들을 현미경을 통해 보여주면서, 40대가 되면 여기저기서 면역력 저하로 염증이 발생하는데 이번에는 전립선이었나 보네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현미경을 비춘 화면 안에는 염증들이 활발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저 염증들이 많은 편인가요? 라는 저의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네 적지는 않은편입니다.' 라는 정치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임원들에게 발표할 때 주로 하는 답변과 비슷해서인지 친숙했습니다.


저는 40대 질병설에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맞아요 선생님 작년에는 돌발성 난청도 있었구요, 녹내장도 있었고, 여기 보세요 지금은 결막염이예요. 조금만 잠을 못자고 피곤하면 어디든 이렇게 티가 납니다. 라고 하소연을 늘어 놓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도 그 나이때에 그랬어요. 면역력 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라는 말로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가장 큰 위로는 나도 그래봤다, 그거 다 이겨낼 수 있다 라는 말이 아닐가요?


의사 선생님이 진료하는 입장에서 본인이 경험한 경험담과 극복후기만큼 환자에게 크게 다가오는 위로는 없을 듯 합니다.


원래 쓰려던 글은 다음주로 미루겠습니다. 가는 길에, 판교역 앞에 있는 닭꼬치 하나 사먹어야 겠어요. 카이센동이 양이 얼마 안됩니다. 공깃밥을 하나 추가해서 먹어도 배가 고파요. 한창 성장기인 40대 중반이라 그럴까요. 여기저기 아픈데, 불쾌한 검사까지 해서 심리적 공허함이 있을까요.


아무튼 불향 가득한 닭꼬치 하나 먹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습니다. 아참 닭꼬치는 양념 말고 소금구이로 드셔야 해요.


벚꽃은 왜 이렇게 흐드러지게 폈는지. 닭꼬치 한 입 베어물고, 벚꽃 한 번 쳐다보고 하면 낭만 치사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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