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의사표현과 깔끔한 관계

by 꼬르따도

아내가 2박 3일간 출장을 갔다가 어제 돌아왔습니다. 혼자서 애 둘을 돌보느라 진이 빠질 때쯤이었는데, 돌아오니 너무 반갑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예뻐보이기까지 하네요. 그러니 가끔은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그동안 아내 혼자 아이 돌보느라 고군분투했을 순간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서 애틋한 마음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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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받은 전립선염 약 중에 베타차단제가 있습니다. 이 약 부작용으로 고생 좀 했어요. 약사님께서 아침에 눈뜨고 일어날 때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낙상에 조심하라구요.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부작용으로 코막힘 입마름 어지럼증이 있다고 하는데 셋 다 동시에 찾아와서 밤에 한숨도 못잤습니다. 코막힘이 너무 심해서 고생하는 사이, 밤새 뜬 눈으로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전립선에 좋다는 호박씨 오일로 만든 건강보조제를 주문했습니다. 두어시간 눈을 붙인 거 같은데 전혀 피로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First dose effect 라고 처음 약을 접할 때 몸에 이상 반응이 크게 나타나는 증상을 일컫는 용어가 있습니다. 먹다보면 몸도 적응하겠죠. 그렇지만 아이들을 2박 3일간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저는 전립선의 건강보다는 숙면을 택해서 첫날 이후 약을 섭취하는 걸 멈췄습니다. 차주에 병원에 가서 부작용이 덜한 약으로 바꿀 예정입니다. 다들 부디 아프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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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습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말을 걸었어요.


'우리 위층이 너무 시끄러워요. 애가 뛰어다녀서요. 그래서 우리 엄마가 윗집 한 번 혼내 주겠대요. 우리 엄마 디게 무서워요.'


'응 그렇구나. 조심해야지 서로서로.'


아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마침 우리 아래 층입니다.


'너는 17층 몇 호에 사는데?'


'12호요.'


앗 우리 바로 밑에 층입니다. 아이가 이어서 물어봅니다.


'아저씨 몇 층 눌러드릴까요?'


고민하다가 임기응변으로 12층이라고 답했습니다. 실은 18층인데요. 엄마가 무섭다잖아요. 우리 혼내주겠다는데 지금 혼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순간 거짓말이 입밖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나 우리는 또 엘리베이터에서 조우했습니다.


18층 버튼을 먼저 눌렀습니다. 아이의 눈이 갑자기 커집니다. 할 말이 있어 보입니다.


'미안 아저씨 너네 집 바로 윗집이야. 우리 아들이 내 말을 안듣고 지금도 가끔 뛰어 다녀. 그래서 집에 방음 매트를 다 깔았어. 조심할께. 전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손편지도 쓰고 크리스마스 쿠키도 문에 걸어놨는데 잘 먹었니?'


'찬이야 인사해. 형 조심할께 하고.' 하면서 둘째의 머리를 꾹 눌러 강제로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조심할께 라는 말을 덧붙였어요.


사실 3개월동안 아랫집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습니다. 멀리서 그 아이가 보이면 일부러 놀이터를 한바퀴 더 도는 식으로 함께 같은 공간이 있는 타이밍을 미뤘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의사를 전달하는게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겠어요?


아랫집 엄마가 찾아와서 한 번 항의도 받았습니다. 어젯밤 새벽 4시 30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라고 묻는데 말문이 막히더라구요. 마침 쪽쪽이를 떼던 참이라 밤에 심하게 울고 발망치를 두드렸다 설명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둘째의 실체를 보여주니 나름 납득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우람합니다. 25개월이예요 하면 다들 놀라요 다섯살 처럼 보인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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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면 상대방도 납득합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는 표현도 솔직하게 하면 신뢰를 받습니다. 회사에서 제가 담당하는 시스템이 오류로 그룹사 전체에 스팸메일을 뿌렸습니다. 그래서 본사 요청에 따라 사과 메일을 보냈는데, 마치 전현무의 사과문처럼 깔끔하다는 평이 여럿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 잘하는 사람으로 홍보가 된 셈입니다.


잘못했다는 사과와 사고 경위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까지. 그동안 회사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메일이죠. 애매하게 양해 부탁드린다느니 부득이한 사고였다느니, 개발사의 부주의였다느니 하는 표현은 지양했습니다.


제 잘못이다, 언제까지 해결해서 다음부터는 동일한 이슈가 발생하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방점을 찍었습니다. 실은 일단 메일이 날아가지 않게 자동 메일링 기능을 잠시 정지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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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윗분들하고 협의를 하거나 성과 평가나 연봉 협상 등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효과적으로 나의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순간이 적지 않습니다. 회사가 알아서 해주겠지 생각하거나 팀장이 내 노고를 알아주겠지 하는 생각은 굉장히 나이브한 태도입니다. 나의 권리에 대해서는 내가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여 스스로 보장을 받아야 합니다. 남들은 절대 내 노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과를 더 줄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죠.


사실 이런 자리는 피하고 싶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내 미래를 결정하고 내 업무 바운더리를 지키는 자리라면 마음을 다잡고 분명하게 내 의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때 너무 뜬구름 잡거나 과장하면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면 좋아요.


예를 들어, 사용자 이슈 접수를 시스템 내 창구를 통해 전달 받아 메일이나 그룹웨어 티켓 창구로 전달 받을 때보다 한 스텝을 줄였다 이로 인해 이슈 해결 일수를 30프로 줄였고 공수도 20프로 절감했다, 배달 사고도 제로로 줄였다 등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는게 좋습니다. 내 업무를 수치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회사는 매출을 증가시키고 비용을 줄이는 걸 좋아합니다. 매출 증가에 기여하거나 비용 절감에 기여한게 있다면 수치로 적극적으로 어필해야죠.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더 이상 어려운 자리를 피할 일도 없고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줄어듭니다. 표현을 해야 윗 사람들도 내가 묵묵히 일만 하는 예스맨이 아니라 필요할 때 본인 권리를 찾을 수 아는 사람이라고 인지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내 선을 쉽게 침범당하지 않고 회사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에서도 후순위로 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팀원들은 회사 비용으로 본인 역량 향상을 위한 교육을 받을 때, 나는 비교적 그 혜택이 적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도 내 업무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싶다면서 업무 관련성이 높은 교육들을 찾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쁜 업무들이 마무리 되는 연말에 수강하고 싶은데 마침 팀 교육 예산이 남더라는 식으로 미리 예산도 선점해야 합니다.


아랫집 아이와는 부쩍 친해졌습니다. 가끔은 내 아들과 놀이터에서 놀아주기도 합니다. 정직한 사과와 담백한 재발방지 대책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나 봅니다.


깔끔한 의사 표현은 관계를 더 깔끔하게 해줍니다. 회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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