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면 뭐라도 남겨야지

by 꼬르따도

지금은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길입니다. 올 초에 논문을 하나 썼는데 논문 발표를 해야 학회지에 논문이 실리니, 논문 발표를 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제주도 학회를 가기엔 너무 멀고 나름 합리적인 부산으로 택했습니다. 사실, 제주도 학회 가는 건 눈치가 보이기도 합니다. 제주도는 공부하는 곳이라기보단 휴양지에 가까우니까요.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회사 생활 17년차인데 지금껏 회사를 다니면서 구축한 눈에 보이는 산출물이 딱히 없었습니다. 누군가 무슨 업무를 해요? 라고 물어보면 시스템 엔지니어이자 PI(프로세스 개선) 담당이라고 말을 합니다. 회사에 필요한 연구개발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이를 위해선 사전에 회사 업무들에 대한 표준화와 알앤알 정의가 필요합니다. 내가 속한 회사에 적합하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죠.


근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회사 일을 하면서 관련 특허 10여건과 이런저런 논문 10여편을 썼습니다,로 내 업에 대한 전문성을 설명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영화를 보면,


당신 뭐야?


할 때 조용히 지갑에서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는 장면 같은 거 있잖아요.


구구절절 설명없이 간단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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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 시스템에는 외부 솔루션을 커스텀해서 구축하는 방식이 있고, 처음부터 회사 차원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개발사로부터 제안서를 접수받아 웹개발 형식으로 외주 형태로 구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솔루션은 좀 무겁고 커스텀이 쉽지 않지만 이미 검증되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영진 설득도 쉬워요. 국내 경쟁사들도 다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는 거기보다 5퍼센트 절감된 금액으로 공급하기로 약속받았고 이미 타사에서 사용성 개선 작업들을 반영하여 안정화된 상태라 바로 적용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수준의 자료를 만들면 됩니다.


웹개발은 PM의 프로세스 표준화 능력이 관건입니다. 우리 회사에 딱 맞춤형으로 개발이 가능하고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이 가능합니다. 가격도 솔루션보다는 저렴한 편이구요. 다만, 앞서 말했듯 회사의 일하는 방식에 맞추다 보니 업계 표준과는 다소 동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전 회사에서 구축한 시스템은, 회사가 그룹사와 합병 되면서 쓸모가 없어져서 서비스 종료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회사에 맞게 시스템 구축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개선 사항들이 도출되고 이를 국제표준이나 규격에 맞춰 시스템을 구현하다보면 자연스레 논문 아이템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이버보안이나 기능안전에 부합하는 검증허브 구축 같은 아이템들입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논문 검색 플랫폼에서 아빠 논문을 찾아 읽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이렇게 얄팍한 수준으로 논문을 다 썼네 하면서 자신감을 얻으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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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각종 면역력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약에 대한 부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 나이가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를 치료하면 다른 병이 안녕 하고 고개를 듭니다.


지금은 전립선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는 어쩐 일인지 나 이렇게 아프다라고 서슴없이 말을 꺼내게 됩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아이 둘 돌보면서 맞벌이 하는게 이처럼 고된 일이라고 은연 중에 표현하고 싶어서일까요. 걱정을 끼쳐 드리는 불효를 부지불식간에 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면 바로 다음날, 아버지가 효과를 본 약들이 한아름 택배상자에 담겨 집에 도착해 있습니다. 효과를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상자안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일단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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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삼일동안 딸아이가 감기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열이 38도 근처에 머물러 있는데 열이 쉬이 떨어지지 않네요. 다행인건 힘이 없고 처지는 현상은 없습니다. 그리고 첫째가 아프면 둘째를 돌봐주시는 시터님이 부리나케 달려 오셔서 본인 일처럼 첫째도 돌봐 주십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제 밤에는 아내가 첫째를 돌보느라 잠을 잘 못자 어제는 제가 첫째를 데리고 잤습니다. 새벽에 열이 오를까봐 걱정되어 잠이 오질 않더라구요. 수시로 차가운 손과 발을 주무르고 미온수로 몸을 닦고 체온을 재며 열 체크를 했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슬몃 들었는데 딸아이 열감에 눈이 떠져 바로 해열제를 먹였습니다. 30분이 지났나 열이 떨어지더라구요.


그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네 아이를 어떻게 키웠을까요. 새삼 존경심이 차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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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아산역입니다. 부산역까진 한시간 반을 더 가야합니다. 아내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제이 열 내렸어. 학교 보낼께.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논문 발표 잘하고 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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