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정한 철수 시대
메신저가 울렸다. P는 악연이라는 표현을 썼다.
- 우리의 악연은 여기서 끝내기로 합시다. 그리고 팀을 옮기는 그 날까지 조용히 있다 갑시다.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할 수 없고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나는 메신저를 읽고 딱히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하드보일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표정으로 즉각 '네' 하고 간단명료한 답장을 보냈을 뿐. 순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라는 빤한 관용어구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악연'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전자에 다니던 나는 동기 신똥의 권유로 지금의 이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 당시 동기 신똥은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려 L전자에서 징계를 받고 어느 술자리에서 '이 회사에서의 내 삶은 끝났어' 라고 엉엉 울던 친구다.
그리고 세상 일이 으레 그렇듯 이직이 절실하던 신똥은 떨어지고 나만 이 회사에 붙었다. 연예인의 '친구따라 우연히 왔다가 오디션에 붙었어요' 뭐 그런 흔한 스토리와 비슷한 셈이다. 그렇게 들어 온 이 회사의 팀장이 바로 P였다. 그렇다, 악연의 시작이다. 그는 세상 좋은 사람인 척, 후덕한 인상과 특유의 찡긋하는 미소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곤 했다. 깔끔한 일 처리에 부드러운 비즈니스 매너 그리고 적절한 유머까지.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그의 가면에 깜빡 속았었지.)
어쨌든 좋은 팀장과 좋은 동료들 덕분에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가끔 동기 신똥은 나를 잊지 말아줘,라며 카톡을 보냈지만 여러 소개팅, 옛 대학동기들과의 만남, 잦은 술자리들에 과거 L전자 생활은 점점 잊혀갔다. 동기 S는 이를 부산에 순희를 두고 상경한 매정하고 방탕한 철수로 빗대기도 했다. 철수는 결코 순희를 찾지 않을 거라면서.
하지만 평화로운 직장 생활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P팀장을 총애하던 채노임원이 회사의 넘버 투가 되면서부터 P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