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1) : '이방인'과 '교황청의 지하실'
푹푹 찌는 여름,
예전에 읽었던 까뮈와 지드를 다시 펼쳐 들었다.
까뮈의 이방인을 펼쳤더니 이상하게도 영화 '무간도' 1편의 양조위가 떠오른다.
그는 무심하게 담배를 물었다.
연기 사이로 달아나는 고요한 표정. 마치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습관처럼 무감하게 숨을 쉬는 존재.
이렇게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모든 것을 비워낸 듯한 무심한 그 배우의 눈빛 위로, 브레송이 찍은 까뮈의 담배 문 초상이 겹쳐진다.
코트 깃을 세우고 담배 한 가치를 문 채, 세상의 고독을 고스란히 짊어진 눈동자로 앞을 응시하는 모습.
마치, 한 시대의 고독을 대표하는 상남자(?)의 이미지처럼.
나는 이방인을 흔히 회자되는 방식, 즉 “부조리 앞에서 고요히 반항하는 인간”으로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나에게 뫼르소는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수동적 인간으로만 비쳐 왔다.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런 인간의 모습을 아무런 미화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반항하는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무력한 인간’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에 가깝다.
까뮈는 이방인에서 그런 날것의 인간존재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포장하지 않고, 초월적 의미 따위로 장식하지 않고, 딱 거기까지, 거기서 멈춘다.
그 이상은 해석이 아니라, 호사가의 사족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렇게 넘어가면 이방인은 결국 '페스트'처럼 구원의 서사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방인을 “삶의 고통과 죽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수용한” 자유의지의 소설로 읽지 않는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선택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굴하지 않는 고요한 반항하는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저 한낱 수동적인 부조리한 굴레에 갇힌,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연유가 아마도 이방인이 나에게 읽을 맛의 소설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과 같이 읽으면 좋은, 쌍둥이처럼 닮은 또 다른 프랑스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앙드레 지드의 '교황청의 지하실'이다
우리에겐 '좁은 문'과,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지상의 양식'으로 잘 알려진 지드이지만, 1914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는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까뮈의 '이방인'(1942)보다 30년 앞선 작품임에도, 인간에 대한 인식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쩌면 까뮈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작품은 마치 쌍생아처럼, 20세기 인간의 초상을 각기 다른 빛으로 비춘다.
지드의 살인은 자유의 급진적 실험이자, 선악의 틀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까뮈의 살인은 부조리 속 무감각한 실존, 의지의 부재, 의미 없음 속의 수동성의 결과다. 하나는 의지의 과잉, 다른 하나는 의지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지드의 주인공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저지른 살인은, 선택의 극단이자 인간 의지의 실험실이다.
반면, 까뮈의 주인공은 무의미한 세계에 감각조차 닫은 채, 태양과 총알 사이의 무표정한 거리에서 살인을 수행한다.
하나는 과잉된 자유가 낳은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결여된 의미가 낳은 침묵이다.
이렇게 두 살인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20세기 인간 존재의 양극을 드러낸다.
자유와 무의미, 선택과 무감각 사이를 떠도는 자아들.
두 인물 모두, 20세기 신의 질서와 도덕의 틀이 무너진 세계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지드와 까뮈가 남긴, 비극적이면서도 투명한 인간의 초상이다.
#까뮈 #지드 #이방인 #교황청의지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