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겨울, 꿈 : 3

by 헬리오스


겨울비

겨울, 꿈 : 3


때로는 단 하루가 한 사람의 평생이 되기도 합니다.


그날의 아침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죠.

특별할 것 없는 빛, 조금 차가운 공기, 그리고 당신이 웃으며 다가오던 순간.

그 하루가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사랑은 오래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순간마다 삶의 밀도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모든 하루는 그 하루의 잔향 속에서 살아가죠.

당신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늘어나지 않고 대신 깊어졌습니다.

몇 분의 침묵이 수십 년의 기억처럼 가슴에 쌓였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시간의 표면을 살고 있지만 마음은 늘 그날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날 밤,

하룻밤을 다 써버린 비처럼 나는 조용히 왔죠.


방울조차 맺지 못한 마음으로

말 대신 대지에 먼저 닿아 나 자신을 풀어놓고,

열리지 않는 창을 밤새 두드리다

손끝이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그저 거기 있었죠.


얼마나 망설였나요, 나는.

얼마나 돌아섰다가

다시 와서 어둠에 얼굴을 묻었나요.


지쳐버린 나의 마음은

새벽보다 먼저 그쳐버렸고

겨울에 온 나는

끝내 눈이 되지 못하고 겨울비가 되어

그리움 하나만 들고 당신을 찾았을 뿐인데,


아침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옅어져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 떠나가 버렸죠.


그때의 당신은

창 안에 서서

내가 남긴 흔적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네요.


한 방울, 두 방울

유리 위를 타고 흐르던 나의 마음이

당신 쪽으로 닿을 때에도 당신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침묵은 당신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늦게 몸을 가졌기 때문이겠죠

그 밤은 단 하루였지만,

하루 안에 기대와 설렘이 있었고, 망설임과 두려움이 있었고,끝내 꺼내지 못한 고백이 있었죠.

사랑이 태어나고, 사랑이 가장 찬란해지고, 이미 사라질 것을예감하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이 그 하루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고,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죠.

‘가장 험난한 길이 가장 아름다운 목적지로 이어진다’는

그 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 설명도 없이 그 밤을 건너왔지요

그 길 위에서 하루의 공기 속에 수년치의 마음이 눌려 들어갔고, 한 번의 눈 맞춤에 나의 삶은 더 이상 흘러가지 않고 정지한 느낌이었죠.

한 번이라도 가장 아름다웠던 곳에 머물러본 사람만이 아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감각이 내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보낸 날의 수가 아니라

숨이 갑자기 멈추는 순간이었죠.

평범하던 하루가 돌이킬 수 없게 다른 질감을 갖게 되는 일.

당신과 나눈 말들은 많지 않았지만 말보다 먼저 마음이 닿는 일.

손끝이 스칠 때마다 나는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을 이미 다 살아버린 기분입니다.

사랑은 오래 남는 기억이 아니라 단 한 번,

되돌릴 수 없이 깊어지는 체험입니다.


이후의 날들은 그 하루를 반복하지 못한 채 겨울비처럼 조금씩 흩어져 갔죠.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루의 끝에서 그날의 당신을 다시 불러냅니다.

짧았기에 더 깊었고, 지나갔기에 더 선명한 그 이름은 당신이었죠.

나는 그 하루로 평생을 살았고,

그 평생의 이름은 여전히 당신이네요.


#사랑 #빗방울 #겨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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