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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 둘

비릿한 날것과 불편함을 통한 통찰.

by 헬리오스

한강,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 둘 : 비릿한 날것과 불편함을 통한 통찰.


책의 제목은 '채식주의자'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익다만 날생선을 먹는 듯 비리고 불편했다.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 고집하는 영혜에게 아버지가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것처럼 독자인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자꾸만 내 목구멍에 강제로 음식을 쑤셔 넣는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고통의 추체험을 통한 인식의 확장을 무자비하게 끌어내는 힘을 가진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감춤을 거부하고 고통을 은유로 포장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불편함을 직면하게 만들기도 한다.

톱니바퀴가 제 살을 깎으면서 돌아가듯이 채식주의자도 그 고통 속으로 같이 걸어 들어가야만 끝까지 볼 수 있다.

이야기 전개의 과정은 너무나도 날것의 상태로 독자에게 던져지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 노골적이고,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더불어 본능, 파괴의 인간본성의 어두운 면을 날것 그대로 불편하게 탐구하면서 과연 '문학적 포르노'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3개의 연작도 독립이지만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이 소설 전후의 작품들과 연결된 고리일 가능성이 아주 크게 보인다.

작가는 일관되게 개인의 내면적 고통과 사회적 억압을 탐구하는듯하며, 채식주의자는 단지 이 여정의 한 부분일 뿐인듯하고 아마도 모든 작품을 읽고 나서야 그 전체 그림이 드러날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불편한 현실을 날것으로 내세운 의식의 확장이자 일련의 흐름으로 보인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첫 번째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의 고통과 불편함을 끝까지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추체험을 하게 하는 지점이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사회적 억압의 충돌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는 체험적 과정을 겪게 되며, 이 과정은 3개의 연작과 맞닿아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동하면서 그 깊이를 더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영혜의 고통을 그대로 추체험하게 되며, 그 고통은 내 살을 벨 것처럼 날카롭게 날것 그대로 피의 비린맛으로 나에게 전달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영혜의 고기가 피투성이로 드러나는 순간, 형부와의 관계의 순간, 독자는 그 고통을 온전히 마주하지만,

그 묘사가 지나치게 생생해 독자를 마치 차갑게 날것만 삼키는 듯한 감각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과정에서 독자는 그 고통과 불편함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체험하게 되고, 이런 추체험을 통해 우리는 영혜의 내면에 깊이 침투하여 어느덧 그녀가 겪는 사회적 압박(억압?)과 자아의 붕괴를 같이 체감하게 된다.

독자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날것의 현실이 자신의 홍채를 통해 의식에 들어올 때처럼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되며, 그 결과 의식에는 생채기가 나고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의 의도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러한 날것의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공감과 불쾌함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러나 문학에서 모든 것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야만 하는 것일까?

이건 나의 홍채를 통해 날것 그대로 보는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극단적 노출이 '문학적 포르노'와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한 질문도 독자는 마주하게 된다.


연작 두 번째 작품에서 몽고반점의 모티브가 없었으면 이 작품은 영락없이 ‘문학적 포르노’다..

작품에서 몽고반점은 몸의 엉덩이라는 곳에 새겨진 은밀한 흔적이자 본능과 억압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체의 가려진 부위에 위치하여 사회적 시선에 쉽게 드러내지 않는 본능적 충동과 억압된 욕망을 은유하는 대상으로 기능한다.

몽고반점은 영혜에게 욕망을 드러내기보다는 반대로 감춰지기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억압과 은폐의 역동을 드러낸다.

반면 이 반점은 은밀하지만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는 흔적이기에,

인간 본능 속의 충동은 억눌린 상태로 사라질 수 없이 감추어진 상태로 영속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으며

결국은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억압된 욕망의 영속성의 모태로 잉태되어 있다.

이후 이 반점이 형부를 통하여 드러났을 때 영혜는 자신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형부와 관계를 가지고

나아가 이제는 억압에서 해방되어 나무가 되고자 한다.

이러한 상징적 장치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어 몽고반점은 독자에게 자극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와 성찰의 기점으로 다가오며, 이것은 이 작품이 문학적 포르노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고심한 흔적이며, 고통과 욕망을 독자에게 ‘불편함을 통한 성찰’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포르노와 예술의 경계가 단순히 '얼마나 많이 드러내는가'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라는 은유의 깊이에 달려 있다면, 몽고반점이라는 상징에도 불구하고 채식주의자에서 날것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수많은 장면들이 과연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는지, 나아가 결국 문학적 포르노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독자에게 남는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오래전 본 영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이 생각났다... 이 영화 또한 경계가 어디인지 많은 고민을 하게 한 작품이다.


확실히 한강이 은유와 여백을 남겨두지 않고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강렬하다.

하지만 독자에게 상상할 틈을 주지 않고 모든 것을 앞에 던져버리는 방식이 과연 문학적으로 적절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웃음도 은유도 없고 작품 내내 슬픔으로 적나라하게 쥐어짜면서 짓이기만 한다.

이 질문 속에서 나는 문학적 여백과 감춤, 은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작가의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 독자를 즉각적인 충격으로 몰아넣는다면,

감춰진 것들은 그 충격이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독자의 의식 속에서 더욱 깊이 스며들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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