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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7 : 비 오는 들판에 나를 심는다.

연작 7

by 헬리오스


비 오는 들판에 나를 심는다.


저 멀리 산위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멀리 들판 끝에서

굵은 빗줄기가 몰려온다

바람보다 느리게,

그러나 마음보다 먼저

장한 비가 밀려온다

들판 위에, 숲 너머 산 위에.


마른 풀 끝에 매달린 마지막 먼지가 씻기고

겨우내 묻혀 있던 씨앗 하나가

비에 젖은 흙을 부풀리며

조용히 꿈틀거린다.

그 작은 움직임에 온 들판이 울먹인다.


산은 비를 온몸으로 받는다.

진달래는 이미 져버렸고,

철쭉의 분홍이 제 몸속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하며,

버드나무 잎은

빗물에 비친 하늘을 닮아 더 투명해졌다.


나는 멀리서 그것들을 바라본다.

우산도 없이,

그저 나무 아래에 잠시 멈춰 선 채.

젖은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와 코끝에 맺히고

오래전 기억의 심장 쪽에서

말없이 움츠려 있던 마음 한 조각이

조용히 꿈틀거린다.


어떤 풀은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켠다.

어떤 잎은 나뭇가지 끝에서 새벽처럼 맑게 터진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자꾸 누군가를 떠올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오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나를 씻고, 뿌리내리고,

빛과 물을 품은 흙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 내리고,

산과 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더 푸르게

더 단단하게 돋아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나의 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조금 더 초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다시 바라본다.

들판을 가득 메운 비,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생명,

그 잎들에 담긴

힘과 고요한 용기를.


누군가가 묻는다

무엇이 그렇게 장하냐고.

무엇이 그렇게 아름답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나무 밑에 조용히 앉아,

젖은 땅에 손을 대고,

갓 움튼 작은 새싹 하나가

흙을 밀고 올라오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 순간이 하나의 대답이며,

나의 사랑이며,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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