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8
비가 내린다.
5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눅눅하다.
창밖의 초록은 분명 생기 있어 보이고 네 눈동자는 늘 그렇게 맑은데
내 마음은 반대로 시들어 가는구나.
누군가는 지금이 봄의 절정이라고 말하겠지.
꽃이 피고, 바람은 따뜻하고, 햇살은 부드럽다고.
하지만 나는 느낀다.
올해의 봄은, 유난히 잔인하다.
나는,
세상을 멀찍이 바라보며
차갑게 식은 커피잔처럼 조용히 식어가고 있다.
마치 뜨겁던 심장이
네 이성 앞에 닿자마자
눈 속의 불씨처럼 꺼져버리는 기분이다.
세상은 늘 나에게 차갑게 말했지.
그래서 나도 차갑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조금씩 단단해졌다.
식은 마그마가 돌이 되듯, 불타던 마음도 그렇게 굳어가더라.
그런데 너는…
넌 세상을 끌어안더라.
말보다 온기로, 이성보다 마음으로.
너는 세상을 바라보더라.
따뜻한 눈으로.
그래서 나도
너의 온기로 내 안의 불씨를 되살려
너에게만은 뜨겁고 무모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말보다 온기였고, 이성보다 감정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세상은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나를 대할 땐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내가 가까이 갈수록
한 발짝 물러서는 네 태도는
사람이 아니라 이론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모든 걸 감싸 안을 듯한 너의 마음은
나를 향할 때만 이상하리만큼 냉정했다.
나는 네가 세상을 그렇게 품는 걸 보며 부러웠고,
나는 그 반대로,
세상에는 식은 채로 등을 돌리고,
너에게만은 뜨거운 심장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심장은
네 앞에 닿기만 하면 식어버린다.
늘 계획된 만남 속에서
나의 뜨거운 심장은 그 오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갔다.
세상을 밀어내고서라도 너만은 꼭 안고 싶었다..
뜨겁게, 무모하게, 한없이, 한없이.
너의 말,
너의 눈빛,
네가 지켜내는 이 단정한 침묵은
얼음처럼 차갑게 날 감싸 온다.
내가 아무리 불덩이처럼 너에게 다가가도
그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오늘의 5월이 슬프다.
이 비 오는 오늘처럼.
우리는 서로를 거꾸로 품고 있으니까.
같은 비를 맞으면
내가 비를 맞으며 너를 품고 싶은데,
너는 멀리 가서 피하고 나는 그 자리서 멍하니 젖는다.
너는 늘 이렇게 말하지.
사람의 마음은 논리로는 다 풀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너는 나의 심장을 논리로 이성으로
쪼개려 하지.
… 너는 알고 있을까.
세상이 이렇게 눈부신 계절인데도
나의 뜨거운 심장은 잿빛이 되어가는 것을...
이 조용한 낮의 빗속에서
내 마음이 얼마나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심장이
잠깐이라도 서로 바뀔 수 있다면.
잠시라도 같은 온도로 서로를 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말이야...
올해의 봄은, 그 어느 해보다 잔인한 봄이야.
나는 사랑을 했고,
너는 침묵했다.
그 모든 것이
5월의 비처럼 조용하게, 그리고 너무도 차갑게 내렸다.
그래서 그래서
이토록 눈부신 5월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 거야.
사랑은 있었지만 닿지 못하고,
온기는 있었지만 전해지지 않았기에.
오늘 비 오는 날 오후에
나는 그저 젖는다.
조용히 젖고, 조용히 식어가고, 조용히 너를 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