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5/토/때때로 비
우르르릉. 오르막의 중간쯤이었을까? 하늘색은 아직 준비가 안된 듯한데, 묵직한 음향이 귀에 먼저 도착한다.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만 패스. 더럽.
12시부터 3시까지 비 예보가 있었다. 12시에 라운지를 나설 때 아무 생각 없었다. 반팔, 반바지에 운동화로 갈아 신고, 선글라스에 오른쪽 귀에 이어폰, 빨간 손수건(치곤 좀 커다란)과 휴대폰을 들고 여느 때와 같이 경사를 오른다. 정상을 돌아 간이 체육공원?에서 45kg 무게로 벤치프레스 15개를 하고 내려오려는 찰나에 일기예보가 맞아 들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다. 산길 중간중간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는 옹기종기 등산객들이 보인다. 그럴 시간이 없다. 점심시간 안에 복귀해야 한다. 빨간 수건을 머리에 쓰고 선글라스… 아 귀에 거는 부분을 뭐라고 하지?…. 아… 안경다리. 안경다리로 수건을 눌러 귀에 고정. 날 멈출 순 없어.
고2 때였다. 토요일 하교 시간에 건물을 나서서 교문까지 중간쯤에서 오늘보다 더 굵고 요란한 비를 만났다. 우산을 챙긴 친구들이 없었던걸 보면 예보되지 않은 비였다. 친구들은 가방을 머리 위로 하고 이리저리 내달리기 시작했고, 마치 영화에서처럼 나만 슬로모션으로 교문을 향해 걸었다. 일정한 속도로. 비에 맞서서.
갑작스러운 비에 교실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린 담임선생님은 그 녀석이 교문을 벗어나 유유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고, 다음날 엄마를 소환하셨다. ’아드님 육사 보내세요.’
소나기를 만나면 자연 소환되는 레퍼토리. 그리고 또 하나. 학창 시절 가슴에 작은 애벌레 한 마리 심어주었던 황순원 님의 ‘소나기’.
오늘도 비를 쫄딱 맞으며 일정한 속도로 걸었고, 소설 속 장면 몇 컷이 떠올라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살면서 갑자기 만난 수많은 소나기들. 예고가 없어서 당황되기도 했지만, 예고가 없어서 담담하게 맞을 수 있었는지도. 갑자기 내리는 바람에 산에 갈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고, 우산을 들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고, 우산을 들지 않아서 산행이 수월했다. 갑자기 만난 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