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9/수/맑음
유형록. 25년을 건너 기억에 남은 이름. 유형록. 원사.
베트콩을 때려잡은 파월장병. 증명사진처럼 그의 사무실인 행정실 책상 유리판 아래로 시체로 추정되는 물체를 밟고 허리에 양손을 올린 위풍당당한 흑백사진이 있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 커다란 눈에 거친 입. 강한 인상의 그를 만난 건 소대장 교육을 미치고 첫 부대 배치를 받고 일산에 위치한 백마부대 예하 연대 전투지원중대 1 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 소대를 비롯한 모든 병사들은 행정보급관 말이라면 벌벌 떠는 카리스마. 거친 입보다 빨랐던 그의 쪼인트(군홧발로 정강이를 차는 행위의 전문용어)는 독보적이었고 목격 만으로도 경험 이상의 효과를 주는 가공할 무기였다. 유 원사님(당시엔 내가 상급자여서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원만한 군생활을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처럼 느껴졌다.
당직근무를 서면 행정반 그의 자리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는데, 아침에 출근하면서 건네는 ‘수고했어요’라는 인사말도 거칠고 투박했다. ‘아침 드셨어요?’
내가 건넨 인사말에 ‘아침은 무슨… 어쩌고 저쩌고…’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뭐 느낌상 아침 따위 신경한 쓴다는 상남자? 부대 걱정에 일찍 출근하려 아침을 거르는 충직한 군인? 임을 어필하는 투였던 거 같다. 자리를 반납하면서 야간 근무자용 간식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슬쩍 밀었다. ‘소대장 먹어요. 난 우유, 빵 안 먹어’
그러든지 말든지 ‘에이 드세요. 밤새고 나니 입맛도 없어요’ 재빨리 행정반을 나서서 BOQ(독신 장교 숙소)로 향했다.
연병장에서 포술훈련 중이었던 어느 날. 만화에서 나올 법한 걸음새로 다가온 유 원사님이 내 손을 잡고 다짜고짜 끌고 연병장 끝쪽으로 끌고 갔다. ‘어어… 교육훈련 중이에요’
‘아 따라와 봐요’ 뭐지? 거칠지만 다정한, 다정한 채 하기 싫은데 들키고만 듯 한 어색한 어투. ‘소대장 이거 뭔지 모르지?’ 난데없이 끌려간 내 손에 커다란 솔방울을 올려주었다. 연병장 가에 심긴 소나무에서 방금 따낸 따끈따끈한 솔방울. 당시 서울촌놈이었던 내게 ‘이거 못 먹어봤지?’하면서 건넨 건 다름 아닌 ‘잣’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그날 내가 겪은 영광의 순간이었다.
베트콩을 때려잡은 파월용사. 빛바랜 증명사진으로도 충분했는데, 한참 뒤에 그가 고엽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말을 수소문할 용기가 없었는지 그의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때늦은 교육 복이 터져서 일주일 만에 다시 2박 3일 교육과정에 들었다. 가평에 있는 연수원. 가평에 드니 온 군데 잣이다. 그래서 그가 떠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너무 또렷하게.
얼추 출생일을 역산해 보니 아직 생존 가능한 나이다. 제발, 잘 치료되어 잘 살고 계셨으면. 잣 알을 빼내 건네주면 억지로 감추던 그의 미소가 떠올라 내 입가에 살짝 번졌다.